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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마 16:21~28)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말로 큐리어스, 로마어로 시저스, 곧 왕, 황제라는 말입니다. 당시 세계를 재패해서 온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는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유다에 있던 왕들은 한 지방의 영주격이었습니다. 그들도 감히 왕이라는 표현을 못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하늘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열쇠입니다. 이 고백을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유대인들이 당시만 하여도 금기시 하던 십자가란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십자가란 표현에 대하여 거세게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부르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기억에 생생할 만큼 오래되지 않은 때에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처형을 당한 사건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내라는 명령을 내리자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세금을 낼 왕은 하늘의 하나님 뿐이라면서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 수천 명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잔인하게 처형하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은 저주를 받은 상징입니다. 잔인하게 당한 십자가의 처형은 한편으로는 두렵고 공포스러운 형벌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치인 아픔이었습니다. 힘이 없고 연약하지만 하나님까지도 치묵하셨던 그 십자가의 형벌을 당한 유대인들은 십자가란 말을 꺼내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었습니다. 세금을 거절하다가 처참하게 깨진 상황이어서 화와 물분이 가득한 상황인데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란 표현을 하셨고, 거기다가 예수님까지도 그 십자가에 돌아가신다고 하자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 거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태도는 매우 단호하셨습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자신의 길을 막지 말라는 것이었고, 자기를 따르려면 십자가를 멀리하려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죽고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 2:20절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이제 내가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과 관련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아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이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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