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34편에 대해 블레셋 왕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다윗의 시라고 소개합니다. 아비멜렉 아기스의 보좌관이 되어서 아비멜렉 곁에 있는데 아비멜렉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블레셋의 장군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아비벨렉에게 "임금님, 저자는 우리를 수도 없이 괴롭히고, 수도 없이 죽인 이스라엘의 장군 십윗입니다. 저 자를 어떻게 임금님 곁에 둡니까?"라고 고발하며 다윗의 정체를 폭고했다고 해 보십시오. 그런 위기 안에서 살아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다윗이 임기응변으로 미친체하며 침을 흘리며 연기를 했다지만 그것을 믿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이 녀석 살려고 별 짓 다하는 구만 하며 죽이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어둡잖은 연기를 보인 자신이 민망하고 부끄럽기만 할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둡잖고 모자라는 연기를 하나님께서 활용하셔서 아기스가 다윗을 그냥 풀어주게 하셨습니다(삼상21:12~15). 하나님, 대단하시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신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할 때 다윗을 위기 중에 피하게 하신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서도 그렇고 사울을 다윗이 숨어있는 동굴로 들어오게 하심도 그렇고 또한 다윗을 눈 앞에 두고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신 것 모두가 다윗과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경검하게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뼈바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셔서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게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약속 중 뼈 마디 하나도 부러지지 않게 하신다고 하신 대로 예수님의 뼈는 로마 병정들이 부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분명 그들은 죄수들이 죽은 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리 뼈를 부러뜨려야 했는데 예수님의 뼈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이 본문 34:20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35편은 사람은 은혜를 받고도 오히려 대적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36편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어서 사람과 짐승을 똑 같이 돌보고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37편은 세상 사람, 특히 땅을 좋아하는 분들이 읽고 또 읽으셔야 할 시편입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다섯번이나 하십니다. 땅을 좋아하시고 기대하시는 분들은 시37편을 읽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받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41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병든 몸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받으면 육체가 회복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 아픈 육체 주님께 용서를 받고 화목하므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건강이 회복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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