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유다로 왔다고 합니다. 요한이 있던 광야는 요단 강 동편이라는 곳으로 경건한 신앙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바라면서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하여 하시디안이라 불렀고, 그들이 이루었던 공동체를 쿨란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들을 에세네인이라고 하였는데 세상이 속되어 가는 것에서 거룩함을 지키고자 하던 바리새인들이 속세를 떠나서 신앙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이 와서 침례를 베풀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세례 그리고 바울 사도가 설명하는 세례와는 차이가 큽니다. 물론 단어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침례나 세례는 방법, 형식적인 차이로 붙여진 것이므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침례는 물 속에 깊이 잠겼다가 나오는 것이고, 세례는 흐르는 강물이 없고, 그렇다고 침례할 수 있는 깊은 탕이 있는 것도 없는 카타콤의 상황에서 머리 위에 물을 붓거나 뿌림으로써 행해지는 방법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요한이 베푼 침례는 과거 유대인들이 죄를 씻고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서 기자는 요한이 베푼 침례 앞에 '회개의'(3절)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물로써 씻는 예식이 회개라는 말이므로 한 번이 아니라 몇 차례를 받을 수 있게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풀라고하신 세례(침례) 또는 바울이 여러 서신에서 설명하는 세례는 죄에서 죽고, 주님과 함게 새롭게 태어나서 살게 되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예식이므로 단 한 번 뿐입니다. 회개라면 두 번 세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를 받을 수 있지만 죄에서 죽고 새 생명을 얻는 세례는 단 한 번 뿐임을 기억하십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형식을 중요시 하는 증거가 될 수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회개를 회개 정도로 머물게 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회개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요한은 그들이 생활에서 잘못을 하는 구체적인 것들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세례(침례)로 예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사람도 물론 자신들의 과거의 잘못과 실수와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나 형식이나 행위만이 아니라 사람이 완전히 변화된 것에서 시작됨이 다름입니다. 요한은 자신은 물로써만 침례를 베풀지만 예수님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베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세례(침례)입니다. 그러므로 흐르는 강물, 또는 침례 탕, 또는 물을 뿌려서 베푸는 형식이나 방법이 중요하지 않고 죄인을 의롭게 해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신 자신의 피로써 대속의 은총을 받게 하신 은혜가 중요합니다. 침례냐 세례냐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써 본인의 행위나 삶이 유익이 되는가? 온전한가? 덕이 되는가? 주님의 자녀로써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가를 생각하면서 세속에 뭍혀서 사는 사람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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