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종교 개혁의 봉화를 올린 루터는 종교 개혁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역대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지만 종교 개혁은 계속 진행되어 왔습니다. 16세기 루터를 시작으로 종교이루어진 종교 개혁은 사제와 신학자들이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역대하에서 이루어진 개혁은 주로 왕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제사장이 주도한 종교 개혁입니다. 루터나 종교개혁을 하면서 슬로건으로 한 것은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스위스의 장 깔뱅은 오직 주님께만 영광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제사장 여호야다는 후대의 후배들처럼 간결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뼈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었습니다. 16절에 자신과 백성과 왕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세웠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주님께서 주신 직분대로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의 일을 그리고 왕과 관료들은 나라의 정치를 그리고 백성들은 자기가 맡은 일을 하게 합니다. 세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실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난 것은 무엇이든 파기하였습니다. 특히 우상들과 산당들을 파기하였습니다. 네번째로, 성전의 관리를 철저히 하여 부정한 사람은 불허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고 만든 규칙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왕과 관리들이 출인하는 문으로는 그들이 들어오게 하였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그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출입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개혁을 한 후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왕이 개혁을 준수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법을 만들고 지키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나 제사장 여호야다가 실행한 개혁에서는 개혁하겠다며 약속한 것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결과 그가 살아있는 동안 나라가 평안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마음에 평안과 생활에 평화를 주십니다. 우리 모두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 주님을 위해 힘껏 수고하고 노력하므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평화를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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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유다는 주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다윗의 왕조가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여호람을 통해 북 이스라엘과 이방 시돈 사람 이세벨의 피가 유다로 들어오더니 급기야는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자 그의 어머니 아달랴가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라는 직위를 갖고 유다에 있는 왕자들과 왕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여호세바라는 누나를 통해서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몰래 숨겨서 살리게 하셨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세바의 조카이죠. 그것을 모르던 아달랴는 왕이 되어 유다를 여섯 해 동안 통치를 합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여호야다라는 제사장이 아달랴를 제거하고 다시 요아스를 왕으로 앉힙니다. 나라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쓰임을 받은 제사장 여호야다는 모든 것을 주님의 법 안에서 행합니다. 주님의 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의 법 바깥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제사장 여호야다는 주님의 법 안에서 모든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아달랴를 처형하는 것도 성전 바깥에서 하게 하였고, 자신의 계힉을 진행하는 동안도 주님의 법을 따르면서 하였습니다. 나라가 어렵고 힘들 때는 자기가 주권자가 되고, 자기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군부가 그랬고, 신군부가 그랬습니다. 군인으로 구테타를 일으켜서 영구적으로 다스리려던 사람은 자신의 부하에게 죽었습니다. 신군부들의 구테타로 의하여 나라가 나라가 역행을 하는 동안 신군부들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부정축재를 합니다. 권자에서 밀려나간 이후에도 부정축재를 한 돈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나라에 갚아야 할 돈이 수 백 억이 된다고 하는데 이미 자신들의 재산을 아들이나 며느리, 심지어 집안 일을 돌보는 집사의 이름으로 모두 이전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신에게는 백만원도 안 되는 돈만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나라와 국민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볼 수 없는 일들이 선진국으로 들어가려는 한국에 있는 현실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남 유다에서는 다윗의 자손 이외에는 다른 사람이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이 그것도 북 이스라엘 시돈 사람 이세벨의 피를 받은 사람이 왕족들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고자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내 쫓을 때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점, 두번째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과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일은 주님의 계명과 말씀을 따라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한국의 역사를 역행한 신군부들에게 어떤 벌을 내리실지가 궁금합니다. 좋은 일, 주님의 일을 한다면서 법을 어겨가면서 바로 잡는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의 일을 행한다는 생각과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늘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은 나라를 팔 년 밖에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입니다. 그런 사람이어서일까요?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이 그가 장남이어서 나라의 왕이 되게 하고, 동생들은 은과 금과 요새화된 성읍들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여호람이 왕권을 정비하자 동생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세벨이 한 행위와 거의 비슷합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은 죽이고 빼앗고 한 사람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잘 아시죠? 아합이 나봇이 가진 포도원 땅을 좋아해서 팔라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나봇은 조상들의 땅이고 하나님께서 팔고 살 수 없다고 하셨다면서 단칼에 거절하였습니다. 아합이 끙끙앓자 이세벨이 불량배들을 거짓 증인으로 세워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 땅을 빼앗아서 남편에게 준 사건입니다. 이세벨과 아합 왕이 극악 무도한 왕이었는데 아버지 여호사밧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세벨의 딸과 아들 여호람을 혼인시켰습니다. 남편도 잘 해야 하지만 대체로 아내는 남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게 악한 행동을 한 여호람은 할아버지 아사와 아버지 여호사밧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걷습니다. 우상 숭배를 근절시켜서 순전한 신앙을 위해 수고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반대로 오히려 우상으로 강토와 백성을 더럽히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망하게 계획하시지 않고 그만을 심판하시려고 했습니다. 외부의 적들이 일어나서 공격하게 하셨고, 나라 안에서도 반란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자 창자게 중병이 들고, 악화되어서 창자가 빠져 나와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런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의 딸이 그를 막았기 때문이겠죠? 아내가 그만큼 중요하고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도 온 힘을 다해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용서하시고 회복하셔서 새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호람을 보면서 자녀의 혼인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비록 현실이 그렇게 되었어도 정신을 차리고 믿음을 지키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이 풀리지 않고 힘들고 고통을 받을 때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징계임을 알고, 주님을 기억하고 돌아와서 겸손히 회개하는 지혜와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여호사밧 왕이 주위의 연합군이 남 유다를 침공한다는 정보를 받고, 온 백성에게 금식령을 내리고 주님께 나가서 겸손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레위인 야하시엘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는 말씀을 해 주시면서 그들은 그냥 전쟁 대열만 만들라고 하시며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보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보기만 하라는 모세가 건너지 못할 홍해와 자신들을 잡으려고 쫓아오는 바로의 정예군 사이에서 두려워하며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기만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여호사밧이 주님의 말씀을 받들자 주님께서 남 유다 군 앞에서 연합군을 무찌르시기 시작한 후에 얼마 후에 보니 연합군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이상한 현상을 보였습니다. 이런 현상과 전술은 하나님께서 사사 기드온의 삼백 명 군사를 데리고 미디안 군대와 전쟁할 때 사용하신 전술입니다(사7:22). 그땐 나팔과 횃불을 들게 하셨는데 이번엔 그냥 연합군이 오는 길목에 대열을 만들고, 담대히 서 있게만 하셨습니다. 유다의 적군들이 서로 쳐서 죽였습니다(대하 20:23). 결과로 적군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군인들이 그들의 전리품을 수거하는 데만 꼬박 사흘이 걸렸답니다. 역대하 기자는 여호사밧이 주님께서 주신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게 됨으로써 백성이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의 어머니 실하의 딸 아수바까지 이름을 영광되게 하였다고 알려 줍니다. 물론 그는 다윗 왕의 묘실에 안장되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평화를 그리고 어머니에게 영예를 돌린 아들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겸손히 주님을 찾아서 주님께 순종하면 본인은 물론이고, 백성과 이웃 나아가서 부모에게까지 기쁨과 영광을 돌려 드림을 본문에서 알려 줍니다. 복있는 사람입니다. 추수 감사절 아침입니다. 무엇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릴까를 고민하시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릴지 고민하시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믿음, 그 믿음을 증거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지키는 생활은 본인은 물론이고, 자녀들과 부모님에게까지 기쁨을 안겨 드립니다. 여호사밧이 아버지 아사와 다른 점은 본인의 잘못과 죄를 지적하고 꾸짖는 하나님의 말씀에 발끈하지도 않았고, 반항하지도 않고 겸손히 받아들이고, 믿음의 길을 간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한 것이 잘못이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고, 동기를 꾸짖으십니다. 정직하게 주님을 인정하고 마음까지 교정해 주시는 주님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어떤 차이에 대한 질문은 믿음이 좋을 때에 오는 재난과 믿음이 좋지 않을 때에 오는 재난의 차이를 말합니다. 본문에서 여호사밧 왕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 그리고 마옴 사람들이 결합하여 여호수밧 왕이 다스리는 유다를 침공합니다. 여호사밧은 믿음이 좋은 왕으로써 어떻게 하든지 유다에서 우상숭배를 근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수고한 왕입니다. 그도 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혼인 관계를 맺고 전쟁에도 참전하지만 주님께서 종을 통해 책망을 듣기도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던 여호사밧과 같은 사람에게 오는 재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동방의 의인이라고 극찬하시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사탄이 시기하며 시험을 허락받듯이 믿음이 좋은 사람, 믿음이 좋은 때 사탄은 가만있질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재난과 재앙의 때에 좋은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타민족들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온 나라에 금식령을 선포하고 본인도 참여하면서 주님께 나가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하신 해결안을 갖고 나가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에는 9절이고, 솔로몬과 결의한 내용은 대하 7:13절과 14절에 있습니다. "들어라.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메뚜기를 시켜 땅을 황폐하게 하거나, 나의 백성 가운데 염병이 돌게 할 때에,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 여호사밧 왕은 그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의 그 말씀에 기초하여 9절에서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기근과 같은 재난이 닥쳐 온다면, 하나님 앞, 곧 주님의 이름을 빛내는 이 성전 앞에 모여 서서, 재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겠고, 그러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을 통해서 싸움은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하는 것이다(대하20:15)."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해야 하는 일들 몇 가지만을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 너희는 그들이 오는 길목으로 가서 그냥 대열만 갗추고 굳게 서 있으라. 둘째,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아라. 는 말씀이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본 것에 대한 대답을 얻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 믿음이 좋을 때 오는 재난과 재앙은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자신의 좋은 믿음을 검증받게 됩니다(참고, 고전 3:13) . 둘째, 검증과 관련된 것으로 주님을 더 잘 믿고, 주님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셋째, 본인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사람임을 세상에 알려서 자기에게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믿음으로 인하여 재난과 재앙을 받을 때는 두려워하며 겁내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를 높여주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때를 맞이하여서 본인의 믿음을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우선 기도하면서 주님의 대답을 들어야 하겠죠? 주님께서 네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 마음을 낯추고 겸손히 기도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면 중보 기도하면 됩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서 재난을 해결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주님께서 모두 알아서 해결하여 주십니다. 주님 때문에 늘 기뻐하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믿음의 사람이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아사 왕이 아합 왕과 전쟁에 나갔다가 아사 왕은 전하를 하고 자신도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후에 예루살렘의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여호사밧에게 예후란 선견자가 오더니 악한 자를 돕고 주님을 싫어하는 사람을 도왔다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일반 상식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칭찬은 아닐지라도 위로와 격려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책망을 하고, 심판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한 가닥 심판을 면제하여 준다는 말씀을 전했는데 왕에게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ㅎㅎㅎ 아마 이런 현실을 만나면 잘못한 마음, 미안한 마음, 깨닫는 마음을 가졌다가고 감정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자리가 왕이므로 그렇게 전한 사람이 누구일지라도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사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한 전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대 제사장에게 온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가르치라는 명령과 나아가서 일을 진행하라고 임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을 집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전국적으로 나라를 바꾸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여호사밧의 차이입니다. 회계란 말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이 바뀌고 삶이 바껴야 합니다. 아사가 회개를 하였다라든지 선견자 예후에게 어떻게 대했다는 말은 없지만 그는 행동으로 나라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 제사장들 그리고 최종적인 판결을 대 제사장이 하도록 하였습니다. 왕인 본인은 뒤에게 그들의 사역을 도와주었습니다. 여호사밧의 차이입니다. 아버지 아사는 잘 하였고,잘 한 것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얻은 그 힘을 자신의 공로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지지하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나아가서 발에 병이 났을 때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사를 찾다가 죽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기는 없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성경에는 본문 33절처럼 무심코나 우연히 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표현처럼 무심코나 우연히 라는 말이 신앙인에게도 그렇게 이해가 되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의미에서 이 표현을 제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아합을 심판하실 계획을 엘리야 때 가지셨다가 그가 주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듣고, 겸손해 져서 용서한 적이 있으십니다. 그런 이후에도 아합은 잠깐 뿐 다시 악을 행합니다. 습관이 중요한데 아합의 경우에는 아내가 더 문제였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여인이었는데 이방 시돈 왕의 딸이었습니다. 부부의 악한 뜻이 잘 맞아서 악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왕은 여호사밧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화의 사람이어서인지 아니면 꽤가 많은 사람이어서인지 국내적으로는 신앙과 개혁의 정치를 폈고, 바깥으로는 평화의 정책을 폈습니다. 그렇게 밖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온전한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바깥으로 평화의 정책을 편다하여도 아합의 가문과 혼인의 유대를 맺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무조건 이방인과 혼인을 금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에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보내실 때 환상의 사건을 통해서 가게 하셨고, 그곳에서 큰 이적을 진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의 경우는 나름 정략적으로 혼인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아합의 딸과 결혼한 아들 여호람 왕은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선조 다윗 왕이 걸었던 그 길을 걷지 않고 아합이 걸었던 불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여호사밧의 모습을 보면서 지혜는 주님께 받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여호사밧이 이처럼 아합과 어울리는데 그는 악인이었습니다. 악인은 늘 다투고 빼앗고, 못된 짓을 합니다. 여호사밧을 대접한 아합은 그 자리에서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들의 것을 빼앗자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사밧은 그가 제안한 전쟁에 동의를 하고 참전합니다. 아합이 자기는 일반 병사로 변장을 하고, 오히려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출전을 합니다. 적병이 왕인 여호사밧을 발견하고 공격을 하려 하였을 때 자기의 신분과 아합이 아님을 알려서 구사일생합니다. 그러나 일반 병사로 변장한 아합은 적이 무심코 쏜 화살에 맞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겨해져서 그를 돌볼 사람이 없어 피를 많이 흘리고 죽습니다. 이것이 무심코이고, 여연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전에 아합이 싫어하는 미가야라는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예언을 듣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싫어하는 소리라고 무시를 하지만 그는 결국 예언대로 죽어 돌아오지 못합니다. 귀와 마음을 주님께 두었던 여호사밧은 아합이 주님 없이 감행하려는 전쟁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하고, 미가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합을 따라 갑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악인과 돈독하고 깊은 자리를 함께 하지 않음이 좋다는 교훈을 배웁니다. 여호사밧은 자칫 봉변당할 위기를 겪으면서 다시는 악인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후회와 교훈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악인과도 화목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 화목은 주님을 중심으로 주민 편에서 서 있어야 합니다. 악인과 함께 자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길과 방향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목은 주 안에서 입니다. 주 안에서 그리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금주는 추수 감사절 주간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평화의 시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지난 몇일 동안 아사 왕의 바른 행적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아사 왕의 실수가 나오고 그 실수를 받아들이지 않음과 오만과 결과가 나옵니다. 꾸준하면 좋을 텐데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절말은 이렇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아사 왕이 다스리던 남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어찌된 상황인지 아사 왕은 주님을 찾지 않고 시리아의 벤하닷 왕을 찾아서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합니다. 아사 왕이 벤하닷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아버지를 인용하면서 도와 줄 것을 요청합니다. 물론 벤하닷에게 많은 선물을 보냅니다. 그의 요청을 들은 시리아의 벤하닷 왕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남 유다를 침공했던 곳에서 바로 철수를 하고, 아사는 북 이스라엘이 쫓겨간 곳에서 노회물을 갖고 옵니다. 현상을 보면 그다지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이에 대해 선견자 하나니란 사람이 아사 왕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시리아 왕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아사로서는 두 가지를 변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리아 와아 벤하닷에게 요청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과 그에게 선물을 주었어도 북 이스라엘 군이 남기고 간 군수물자를 거두어 들임으로써 손해 본 것이 없다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니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아사 왕이 하나님에게서 시리아의 벤하닷을 이용하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사 왕이 하나님의 종에게 대한 반응은 매우 교만합니다. 그냥 묵살한 후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하나니를 지지하는 백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자신이 왕이고, 왕이 하는 일을 누가 감히 옳다 그르다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교만이죠? 그래서 선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무엇이든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지 않고, 가하다 하여도 덕스러운 것인지를 고려하라(고전10:23)고 하였습니다. 이미 기초가 틀렸습니다. 주님께서 아시고 종을 보내셔서 지적하시면 이유여하, 결과를 불문하고 그냥 인정하고 겸손히 사죄를 고하면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를 내세우면서 반항하였습니다. 교만한 것입니다. 결과 그는 발에 병이 생겨서 그것으로 죽게 되었는데 주님을 찾는 대신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믿음은 한 때 좋은 것으로 보상받지 않습니다. 끝까지 한결 같아야 합니다. 오히려 마지막이 더 중요합니다. 또 하나 좋은 믿음은 겸손입니다. 어떤 반응에 대해서 겸손하지 못한 것은 교만입니다. 주님께서는 교만을 싫어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과거 자신이 잘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맞지 않습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시면 겸손히 받아들이고, 사죄하고, 회개하면 됩니다. 겸손히 회개하고, 주님과 동행하셔서 한 순간의 실수 때문에 인생을 망치지 않는 믿음과 지혜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아사랴라는 예언자는 유다 왕 아사가 남 유다를 통치할 때 활동했던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께서는 아사 왕이 열심을 내어서 주님께 충성하는 것을 보고 아사랴 예언자를 보내셔서 왕과 백성이 하는 수고에 상급이 따름을 알려 주셨습니다(7). 그 말을 들은 아사 왕은 더 충성스럽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걸었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만을 섬기는 언약을 주님과 세웠다고 하면서 그렇게 살지 않는 백성들은 누구든지 죽이기로 하였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예는 아사 왕의 할머니미야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할머니가 만든 우상을 토막내어서 가루로 만들고, 기드론 냇가에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대단한 결단과 행동이죠? 이런 것을 보고 백성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을 더 잘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 아사 왕이 다스리는 남 왕국으로 이주를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렇게 한결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아사 왕과 그의 나라 유다를 평화로 유지시켜 주셨답니다. 미국의 속담에 공짜 점심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에게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가 수고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상급으로 주십니다. 주님을 위해 충성하십시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게 될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대하 기자는 아사 왕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다고 소개합니다. 그런 왕에게 주님께서는 그와 그의 나라에 평안을 주셨고, 나라가 조용하였다고 합니다. 결과로 여러 해 동안 아무도 그에게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런 아사 왕에게 이디오 피아의 백만 대군 병가가 공격을 해 왔답니다. 백만 대군, 매우 큰 군사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백만 군사가 쳐들어 오면 싸움에 이길지라도 결과는 상상 이상의 큰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시키신 싸움은 주님께서 앞장 서시기 때문에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을 더 해 주시고, 전쟁을 통해서 믿음의 복은 물론이고, 또 다른 복을 주시기 위함이시기 위함입니다. 믿음이 좋은 아사에게 에티오피아의 백 만 군대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네, 결과적으로 주님께서는 아사에게 큰 승리를 주셨고, 에티오군사들이 가지고 온 무기는 아사와 유다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이 싸우지 않고 하나님게서 싸워주셨기 때문에 손해도 없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해 졌을 것입니다. 역대하 기자는 하나를 더 알려 줍니다. 주위의 나라가 그렇게 큰 군대를 물리친 아사와 유다를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아사가 다스리는 유다를 노리지 못하게 될 만큼 유다는 안정되었고, 평안하였다는 소개입니다. 비록 전쟁이 개인과 나라를 위협하고 두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믿음으로 온전하고 건강하다면 전쟁과 같은 재난을 통해서도 주님께서 재난을 복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 자신의 믿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팬더믹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자의 믿음을 돌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고 건강하다면 주님께서는 펜더믹을 통해 축복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상황을 불안해 하거나 불평하기보다 자기의 믿음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복되고 기뻐서 감사가 충만한날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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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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