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향한 성경의 전제는 죄로 죽는다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죄를 지어 죽게 되었지만 아담의 후손들 역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제뜻대로 하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3:23)고 말씀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가 사람들의 관심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 자기들에게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냐?라는 질문 앞에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할 수 없음에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 라는 확신을 갖고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일에 메달려 있다고 합니다. 이방인 역시 율법과 같은 그들의 양심에 저촉되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합니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신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일이라고 합니다. 율법도 충족시키시고, 예언자들에게도 만족을 주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 땅에 사람으로 보내셔서 그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인류가 지은 죄를 탕감받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신 일입니다. 죄를 지으면 피로 그 값을 치뤄야 합니다. 죄를 탕감받는 피는 완전히 깨끗한 피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율법에서 요구하는 완전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게 하신 일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선포하는 예언자들에게도 하나님의 그 은혜가 만족을 주십니다. 문제는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와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엡2:8~9절에 의하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참고, 고전12:3후반부). 따라서 더 이상 율법이나 양심을 준수하므로 구원을 받겠다는 마음이나 시도를 하지 않음이 좋습니다. 대신 율법의 용도와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으려는 자세는 용도가 달라졌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데 필요합니다. 은혜 이전에는 그것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였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 율법이나 양심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게 됩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선까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에는 그것이 모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됨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것을 믿음 역시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입니다.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율법을 무겁고 의무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따르고 행함으로 하나님을 닮는 일이 신자들에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멀어보이고, 모자라는 것 투성이겠지만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살리신 주님께서는 주님을 닮은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천국에서 우리를 우뚝 세워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힘껏 믿음을 실천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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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도 사역을 하시는 동안 출처에 대한 도전을 여러차례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예수님을 증언하냐는 질문과 도전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아서라도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갖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도 사탄은 비열하게 근거와 증언을 묻고 도전을 합니다. 바울도 그런 도전에 시달렸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 뿐 아니라 많은 곳에서 그런 질문과 도전에 시달렸습니다. 바울에게는 분명한 경험이 있고,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회의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랬는데도 근거와 정통성에 대한 도전은 끝이나질 않았습니다. 오늘 읽으시는 본문에서도 사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히지만(고후11:14) 사탄은 선 자를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음(참고, 벧전5:8)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종으로서 받았던 고난들을 설명하고, 나중에는 입신을 경험한 내용들을 증언합니다. 그런 것들이 있어도 본인에게는 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정직하게 내어 놓습니다. 사역자가 왜 아픈가? 사역자에게 어떻게 가시가 있을 수 있는가?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능력있게 전파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았던 당신부터 구원하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겠습니다. 라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너무 잘 압니다. 그런 아픔과 한계를 갖고 사역을 하는데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은 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탄다이셨답니다. 속된 말로 힘든 일입니다. 강하고 완벽하고 확실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힘든 일인데 되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몸에까지 가시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받은 사람들에게로부터까지 시험과 불평을 듣습니다. 사역자로서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런 불평과 의문과 시험들을 향해 일일히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참 피곤한 일이죠? 사역자란 그렇습니다. 왜 일까요? 사탄이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선 자를 움직여서 넘어뜨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들에게 온 자들을 대적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여서 교회를 약하게 하고 어지럽히고, 넘어뜨립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에게 권세와 능력을 빼앗긴 사탄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역자로 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받은 사도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과 자기들의 문제를 나누고, 그들이 사역을 기쁨으로 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야 교회와 교인인 본인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참고, 히13:17, 고전16:16, 갈6:6). 고후 13:13절을 잘 보시고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목사님들이 예배 후에 사용하시는 복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사장들은 민6:2426절의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이후로 사역자들, 안수받은 목회자들은 고후13:13절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는 귀하에게 또한 온 교회와 자손들에게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질그릇인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습니다.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으므로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은 낡아가도 속 사람은 날로 새롭습니다. 일시적으로 당하는 가벼운 고난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보상이 영원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짐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ㅣ.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에 덧입히기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서 있든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길 소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사람입니다. 새것이 된 우리에게 화해의 사명을 주시고, 화해케 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날에 주님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새 삶을 살게 된 우리는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 되었으므로 어둠과 사귀지 않습니다. 불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자신을 엮지 않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어려운 형제, 자매들에게 힘을 다해 도와 주며 구제합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도ㅚ신 예수님을 힘입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형편에 맞게 구제합니다. 자신의 구제와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을 알고 힘껏 섬기면서 삽니다.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니다. 주 안에서 진행되는 새롭고 복된 삶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좌정하신 성령님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복들을 늘 알게 하셔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생활이 되시기리 축복합니다. 아멘.이제 우리는 고린도 후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22절에서는 하나님의 소유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소유는 인이라는 도장을 찍으셨는데 증거로 성령을 그 마음에 주셔서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성령의 도장을 찍힌 것이 매우 큰 특권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천사들이 심판할 때 그들은 손을 대지 못합니다. 사탄 역시 하나님께 제한된 권한과 능력을 받아서 세상을 괴롭힐 때 하나님의 소유는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고후에서는 어떤 특권들이 있을지 한번 점검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무엇이든 예만 하게 됩니다. 예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할 수 있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고 세상의 지혜로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냅니다.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를 내고, 멸망을 당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냄새를 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영으로 편지를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 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셔서 그들에게 언약의 자격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영을 받으므로 자유함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의 의미와 뜻들을 환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담고 있어서 자기와는 상관없이 사랑과 칭찬과 영광의 삶을 살게 됩니다. 보화가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님을 등에 태운 새끼 나귀같이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과 환호를 받습니다.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므로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추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고, 거꾸러 뜨림을 받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해도 속 사람들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깊고 멋진 삶을 삽니다. 주님의 설명을 듣고 나면 하나님의 소유가 됨은 세상 그 어떤 복보다 귀하고 큼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소유임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귀를 열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기쁨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구세주가 되신 것을 확실하게 검증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심입니다.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많은 궁금증을 갖게 하셨을 것이고, 안타까움의 대상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조금도 의심할 바없이 하나님의 아드님과 구주가 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는데 그 증명은 가장 확실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고전15:9절 후반부에서 밝혔듯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던 사람입니다. 왜 박해를 하였습니까? 예수라는 도와 예수가 부활하였음을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왜 박해의 이유가 됩니까? 첫째는 유대교의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혼란케 만들고, 나쁜 곳으로 유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혹새무민한다고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그들이 백성들을 선동하고 난을 일으켜서 로마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진압하고 탄압하는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과 열정을 걸고 예수교와 그들 일당들을 박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던 사람인데 예수교의 복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밝혔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교로 생각하고, 반대하였는데 사교가 아니고 진실이고, 거짓이라 하였던 그 내용이 진실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마음과 반응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바울은 예수님과 그 도와 부활을 생명과 열정을 바쳐서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바울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답니다. 그래서 참거나 쉴 수가 없었다고 고전9:16에서 고백하였습니다. 바울 혼자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면 믿을 사람도 믿어 줄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바울을 인정했던 사람들까지도 그만하라고 권면하며 자제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본인이 언급하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보다 시간적으로 늦었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전파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들보다 늦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를 개인적으로 계산해 보니까 본인가지 모두 514명이었습니다. 514명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대로라면 매우 큰 숫자입니다. 이유는 한 사건이 진실임을 입증할 때 필요한 사람의 숫자가 두 사람이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필요하실 때마다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로서는 사역자여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의 숫자로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증언하게 하시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인용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령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주이심을 세상의 어느 무엇보다 성경과 하나님과 본인의 말씀과 능력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 주는 증언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주로 믿는 사람들도 부활할 것임을 전하는 예고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수님처럼 부활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고전15장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누구일 것 같습니까? 53절과 54절에서 그 대답을 해 주십니다. 썩지 않을 몸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썩지 않을 몸이란 믿음으로 하늘을 바라고 하늘나라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하늘나라의 삶을 산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일이나 세상 것에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 것들로 염려하거나 낙심하거나 속상해 하거나 다투거나 갈라지지 않습니다. 고전15장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습니다. 29절의 말씀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복음이 그것을 권장하거나 하라는 것이 절대아닙니다. 복음을 오해하여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지적이고, 그렇게 하였던 이유는 부활을 바랐기 때문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도 부활해야 함을 알리주고 부활하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그리고 하늘나라에 속한 믿음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전16장에서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본인의 부탁과 함께 사역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사역자에게 어떻게 해야 교우들, 신자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까? 그들을 믿고 그들이 가르치는 복음을 믿음으로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을 신뢰하는 증거는 그들이 가르치는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들의 삶을 나누는 일들이라고 고전16:16절(참고, 갈6:6, 히13:17)에서 알려 줍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처럼 자신도 부활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부활하는 그날 아무런 제약없이 부활의 대열에 합류하도록 하늘나라의 온전한 시민으로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성령에 관하여서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6장)에서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8장)과 고전12~14장에서 잘 말씀하여 줍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성령에 관하여 매우 다양하고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성령은 교인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예수를 자기의 주님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교인들에게 교회의 이익을 위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병고치는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마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렇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데 은사들은 귀천이 따로 없다고 합니다. 만약 귀천이 있다고 하면 오히려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요긴하다고 합니다(고전12:22). 13장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하여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은사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더 큰 은사라는 말씀으로 사랑에 대하여 설명은 해 주시지만 사랑을 은사로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신약성서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어쨌든 사랑은 사람이 살아 있고, 역할을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만은 것들이 있어야 하듯이 교회에는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은사들 중에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하여 더 자세히 설명하여 줍니다. 방언은 자기도 모르는 타국의 말인데 그것을 하면서 주님과 대화를 한답니다. 그러니 방언을 하는 사람은 바울이 권면하는 대로 그뜻을 이해할 수 있는 통역이 필요하겠죠. 방언은 두 가지 면에서 좋다고 합니다. 첫째는 개인의 영성을 위해 좋고, 두번째는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통역할 사람이 없을 때에는 개인적으로 함이 좋다고 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교회에게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당연히 교회에 유익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무질서하게 선포하지 말고 질서있게 선포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이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말할 때 본인은 받은 것이 없다며 약간 움추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예수님을 주로 믿는 확신과 교회를 사랑하며 무엇인가를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전혀 그런 마음을 가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은 은사를 주셔서 예수를 주로 믿게 하시고, 교회를 사랑하며 섬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경건의 생활을 깊이 있게 하시게 되면 받았으면서도 인식하지 못한 성령의 은사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해서 주님이 맡기신 일들을 힘껏 실천하는 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일찍이 루이저 린저는 '왜 사냐고 묻거든'이란 책을 저술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하여 주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본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십니다. 목적과 목표가 있는 사람은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적과 목표는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면 그 사람은 매우 큰 복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본연의 목적을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사4321, 엡2:10)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으므로 자기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한답니다. 그렇게 하여도 자랑할 것이 없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신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영광, 복음 전파 그 일이 자신의 목적이고, 목표이므로 바울은 도든 사람이 종이 된 것처럼 산답니다. 그리고 바울의 소박한 소원을 말합니다. 자기는 자기의 몸을 쳐서 굴복시킽답니다. 이유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기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의 진솔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한답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시험도 있고, 유혹도 있고, 교만도 있습니다. 우상숭배도 있고, 시련도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서 기도하십시오'라고 하시며 예수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기도가 그처럼 중요하므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바울은 살전5:17절에서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삶의 목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므로 그것과 맞지 않으면 포기하였습니다. 본인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본인의 음식 먹음이 다른 사람들을 해가 되고 시험이 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하였(고전8:13)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바울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성만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로써 침례를 하시고, 만나와 반석의 물로 먹이심처럼 예수님은 본인의 살과 피로 성만찬을 만드시고 그것을 주님의 백성들에게 공급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므로 본인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참 좋은 생각이고 성령의 도움을 받을 결심이십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으십시오. 그 다음에는 기도하십시오. 세번째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힘을 얻어서 본인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목적을 갖고 그 목표를 향해 사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목적과 목표를 갖고 사는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들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마6: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적을 갖고 목표를 세워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선하고 좋은 목적과 목표를 갖고 사는 사람은 멋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가장 지혜롭고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구요? 만들어진 목적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절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리면서 주님의 기쁜 음성과 격려와 위로와 칭찬을 듣는 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바울은 자신을 비롯하여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노예, 하나님의 노예라고 합니다. 그렇게 규정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걱정하거나 시험받지 마십시다. 그리스도의 노예, 하나님의 노예가 되시는 주님은 세상 사람과 달리 오히려 자기 몸을 희생하여 자기가 사나 노예들을 사랑하시고, 보살펴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오히려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노예들이 버려야 할 것이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자신의 노예들에게 그것들을 버리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시기 위하심이랍니다. 노예에게 자기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시는 주인을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참 재미있고, 신기한 나라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노예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을 알아볼까요? 우사아 숭배, 간음, 여성노릇을 하는 사람들, 동성애를 하는 자들, 두둑질 하는 사람들,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 술 취하는 사람들,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혹시 이것들 중에 한 가지라도 본인이 행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버리셔야 합니다. 망설이거나 아가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버리십시다. 요즈음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은 여성노릇하는 사람들, 남성노릇하는 사람들, 한 마디의 말로 동성애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그런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하십니다. 교회 바깥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다. 동성애를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본인의 생활에 있다면 뽑아서 버리십시다.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부부 사이에서 있는 일을 알려 주십니다. 부부 사이는 본인들만이 아는 일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들어서 혼자 살 수 있으면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바울과는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혼자 사는 것이 좋았으면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고, 교회에서 결혼을 권장하거나 주례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해야 하혀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신자는 신자와 혼인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불신자와 혼인을 하면 상대가 믿음의 사람이 될 때까지 많은 고통과 혼란과 오해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돌아서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에 대하여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바울도 그렇지만 본인들에게 맡김이 좋을 것입니다. 무엇을 먹는 것, 마시는 것, 다른 사람의 것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과 간섭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통해 시험을 받을 수 있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유함과 섭취를 통해서 시험을 받게 된다고 바울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고, 그리스도의 노예이지 사람의 노예가 아님을 아십시다. 주님의 마음에 들고 주님의 기쁨에 들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주님은 좋으신 분이어서 오히려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려고 하십니다. 주님의 노예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을 받은 분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를 주장하셔서 주님의 것들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채워지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 '모든 면에서 풍족하게 되었다(고전1~5).'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족한 사람이 누구일까라는 관점에서 고전1~4장을 읽으며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어떤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립니다. 분쟁과 갈라짐이 없고 하나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 물을 주는 사람이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인 것 같이 모두가 하나임을 알고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신 예수님을 압니다. 그리스도 인들을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영세 전에 미리 정하셨으나 비밀로 감추어두신 하나님의 지혜를 압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압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도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봅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사도들을 본 받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과 로마서 6장에서 선포하신 말씀에 의하면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서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임을 아는 사람(롬14:8)입니다. 본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풍족한 사람이라고 느껴지십니까? 성공한 신앙인이십니다. 부족한 것들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주님께 드리거나 버리십시오. 주 안에서 풍족한 사람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도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시며 소망 중에 밝게 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아볼로에서 바울 일행은 자신들의 일행보다 그곳에서 먼저 사역을 했던 아볼로라는 사역자를 만납니다. 아볼로는 성서에는 능통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사역에서는 성령 세례는 없고, 회개의 세례만을 가르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굴라와 브리슬라 부부가 그에게 성령의 세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답니다. 그들의 설명을 듣고 아볼로는 사역지를 아가야로 가서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볼로에서 사역을 하게 된 바울의 일행은 성령의 세례를 베풀고, 은혜를 끼쳤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해 왔던 대로 회당에서 말씀을 전파했는데 그들이 믿으려 하지 않았으므로 3 개월 동안의 사역을 마감하고 장소를 두란노 학당(제가 방문한 바로는 에베소의 도서관이었다고 함)으로 옮겨서 말씀을 2 년 동안이나 전했다고 합니다. 그때 에베소에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서 바울의 옷자락이나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유대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귀신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누구냐?'고 물으면서 그들을 짓누르고 때려서 그들이 상처를 입고 도망을 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아무나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최선을 다하지만 자기의 것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세례, 성령의 세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질감없이 받아들여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용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특권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 성령의 인도하심을 은혜 안에서 사용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람이십니다. 힘껏 복음을 전하시며 하늘의 능력을 나누어 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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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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