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출애굽 마지막 장에 왔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께 봉헌할 성막을 완성하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나하나 매우 자상하게 알려 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네, 여전히 모세나 아론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안다고 생각하라 수 있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하나 기본적인 것부터 자상하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사람이 제 마음대로 하면 그대로 할 가능성을 열어두게 됩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상하시지만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알려 주십니다. 모세는 그런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대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으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출애굽을 읽고 묵상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하기에 너무 크시다.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됨은 세상에서 받는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면서도 정의와 공의로우십니다. 따라서 질서와 사랑, 정의와 자비가 늘 있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해서 평화로우시다고 합니다. 하시는 일에는 사랑이 있으시고, 준비가 철저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주님께서 주신 말씀과 계명을 잘 듣고, 기쁨으로 지키며 순종하길 희망하며 기도 드립니다. 주님을 사랑하셔서 주님이 힘이 되시고, 예수님을 닮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0 Comments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곳저곳에서 설명하여 줍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이 따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는 것이 가장 좋고 지혜롭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본인 생각에 능력이 안 되어서 순종할 수 없게 된다면 주님께 구하면 됩니다. 야고보 선생은 지혜가 부족하면 주님께 구하라(약1:5)고까지 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을 어기고 제 마음대로 제사를 집행한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출 39장에서는 모세가 주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였다는 표현이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이집트의 문과 무를 겸한 지도자이고, 나아가서 세상의 지혜자이상으로 광야 40년 동안 자신이 배운 지식과 지혜를 이해하였고, 나아가서 경건을 훈련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모세의 선택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다. 우선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힘을 쓰는가? 두번째 말씀을 들었다면 순종하는가, 네, 기도를 드릴 때에도 자기의 요구나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의 순서가 반드시 필요하죠?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본인의 마음이나 상황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도 순종해야 합니다. 유다 왕 중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수고한 왕들 중에 히스기야 왕을 뺄 수 없습니다. 그랬던 사람인데 죽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펴 달라고 울었습니다. 그 결과 15년이나 연장을 받았는데 이후 그의 삶을 보니까 바벨론의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속을 보여주는 실수를 범하여서 이사야 선지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나아가서 므낫세라는 아들을 낳기는 하나 유다에서 최악의 왕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병이 들기 이전에는 이사야와 좋은 관계였지만 병이 나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이전에 가졌던 감정이 아닙니다. 주님의 종과 은혜로운 관계를 갖지 못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죽고 사는 것은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있고 없는 것 역시 주님의 인도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개인사는 물론이고, 교회의 일, 자신의 봉사 모두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순종함이 최고입니다. 과한 것도 문제고 덜한 것도 문제라고 세상은 말하지만 신앙에서는 그것이 기준이 아니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이 기준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이 최고인줄 알고 기쁨으로 순종하는 지혜가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교회에서는 매년 예결산 공동의회를 합니다. 그때 반드시 하는 순서가 결산보고입니다. 결산 보고에 앞서서 감사가 일년 동안 회계부나 재정부에서 예산을 집행한 내용과 서류를 꼼꼼히 점검하여서 공과를 공동의회에서 보고를 합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할 이유가 있는가? 은혜로 하면 되지, 그리고 모든 것을 상세히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계시는데 그렇게 할 이유가 있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알고 계셔도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리고 전쟁에서 전리품을 욕심내어서 감춘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전투를 하기 전에 전피품에 손을 대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모세는 그 내용을 백성과 군인들에게 통보하였습니다. 그랬는데도 그렇게 훔쳤다가 그로 인하여 아이성이라는 조그마한 성에서 대패를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따금씩 재정 비리가 터지는 내용을 봅니다. 따라서 감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할 수 있는데 본문에서도 백성들이 헌물한 물품들을 보고하는 것을 봅니다. 재정을 보고 하고 감사하면 의도치 않게 실수로 잘못된 내용을 바로 잡기도 하지만 부정을 할 마음을 갖지 않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백성들이 바친 헌물을 상세히 알리라고 하셔서 백성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재정 결산을 발표하고 집행한 사람들의 재정을 감사하게 하여서 보고하게 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관행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못 믿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견물 생심이라는 말처럼 물질을 보면 누구나 욕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잘못을 미연해 방지하기 위하여 그렇게 할 수도 있고, 실수로 발생하는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년말연시를 맞이해서 재정보고와 감사보고를 할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 의심이 가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헌금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것에 대해서 깨끗하고 공정해야 함을 다시금 알게 됩니다. 헌금과 보고로 인하여 시험받지 않고 언제나 깨끗하고 공정한 마음을 가지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저는 목사로서 교인들이 헌금을 해야 가는 것을 늘 기도합니다. 복음을 믿으라 그리고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하시라고 해 놓고 어느 정도되면 헌금을 하는 분위기입니다. 어떤 경우는 담임목사가 헌금을 언급하든지 어떤 때는 부흥회 강사가 헌금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갚아 주신다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교회에 재정을 공급해서 운영하게 하시지 왜 교인들에게 헌금을 내라고 하시는 것일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한국 교회 교인들의 경우에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타 종교, 즉 불교나 무교, 유교의 경우에 헌금을 해 오던 습관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면 당연히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정서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헌금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개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니까 헌금의 종류가 가지가지더라.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빨강 봉투, 녹색 봉투, 하얀 봉투 가지수도 다양하더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왜 그렇게 많을까요? 그 대답을 말씀드리기 전에 헌금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에서도 말씀하시지만 하나님께서 헌금, 헌물을 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교인들에게 헌금을 할 만큼 물질을 공급하십니다. 주시고 주신 것 중에서 십분의 일 그리고 성전세 그리고 죄를 용서받는 것에 대한 헌물, 그리고 용서받은 것을 감사해서 바치는 화목제물과 같은 헌물, 헌금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성막을 건축하면서 금은 그리고 고가의 가죽과 같은 물건을 바치라고 하시고, 성소 앞에 있는 물대야를 만들기 위하여 놋쇠와 같은 헌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바치라는 것이 많죠? 왜 하나님께서 직접 관계하는 종들에게 주셔서 바치게 하시지 않고 백성들에게 바치라고 하실까요? 이해가 빠르신 분들께서는 이미 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소 건축 헌금, 그리고 제사장이 먹고 살 것, 그리고 제사드리는 모든 것들은 제사장이나 바치는 모든 백성이 한 식구 한 가정인 것을 알려주는 행위들입니다. 더 포괄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교회는 모두가 같은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헌금을 하게 하시는 것은 한 공동체, 한 식구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고 나아가서 책임을 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의 백성도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일에 방관자가 아니라 주체가 되게 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주체이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책임을 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많은 종류의 헌금과 헌물을 바치게 하시는 것은 각종 기능과 역할에 따라서 사용되어야 할 용도가 있으므로 바치는 것입니다. 마치 집 페이먼트를 내야 하고, 운영비를 내야 하고, 자동차 보수비나 운영비를 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바치는 헌금에 대해여 이 정도로 설명해 드리면 될까요? 딱 한 가지만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십일조의 경우는 집안의 장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십일조의 용도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하여 바치게 하셨습니다. 물론 배경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히브리 백성들의 집 장자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로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십니다. 장자를 바치게 되면 그 집안의 일과 대를 잇는 일이 곤란하므로 그 대신 레위 지파를 지명하셔서 장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장자를 대신해서 주님께 바쳐졌으므로 그들의 생활비를 나머지 열 한 지파에게 분담을 시키시고 수입의 십분의 일을 주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레위지파와 제사장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일조의 근본 원리입니다. 헌금의 기본은 하나님에 관련된 비즈네스에 주체자로서 책임을 갖으라는 말씀이시지만 주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헌금을 하고 살만한 모든 것을 제공하시고 헌금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알면 주님께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헌금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내가 왜? 라고 생각하시는 사람은 그런 믿음이 들 때까지 안 내셔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본인과 가정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깨달음과 믿음을 갖게 되면 헌금을 하게 됩니다. 헌금은 주신 것을 내게 하시는 것인데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비즈네스에 주체자답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아는 사람은 당연하고 기쁜 마음으로 본문처럼 헌물과 헌금을 합니다. 헌금하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고 기쁘고 감사가 넘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성막을 짓기 위해 자재를 헌물하고 하였는데 백성들이 헌물을 한 결과 너무 많이 가지고 와서 그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낸 것도 이미 넉넉하였고, 남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일에 순종하면 광야이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도 결과가 은혜롭습니다. 그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감동을 따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서는 감동을 주십니다. 이 감동은 차츰 식어지므로 감동을 받은 바로 그 시각에 실천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흔들어 바친다는 의미는 기꺼이 자원해서 한다는 뜻입니다. 헌물을 하든지 봉사를 할 때 억지로 마지못해서 인색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하고 귀한 일에 자신이 초대받고 쓰임받는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세번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감동을 받았다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뜻과 계획을 따른다는 전제와 기본이 바로 순종입니다. 주님의 뜻과 계획을 순종하는 것이 헌물의 첫번째입니다. 네번째는 받은 은사대로입니다. 브사렐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을 듣습니다. 브사렐은 오홀리압에게 그것을 전하였습니다. 오홀리압은 자신의 은사와 기술을 갖고 봉사하러 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고 헌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말씀을 듣고 일사불란하게 진행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헌금을 할 때 그리고 헌물이나 봉사를 할 때 내가 할 수 있다고 내 마음대로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나 뜻과 계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과 인도자들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움이고 절제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기본 원리입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결여되었는지를 깨닫고, 주님께 충성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야훼 이레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에서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사용되었던 중심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은 땔감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하며 묻는 이삭에게 제물은 주님께서 준비하신다. 아들아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믿음과 대답대로 주님께서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남자들이 세번 주님을 만나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칠칠절입니다. 아마 그들이 주님, 남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이방인 공격해 들어오면 어떻게 하죠? 하고 물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너희 땅을 점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24절)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방 어느 나라도 이스라엘을 공격할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그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준비하셔서 말씀에 순종할 때 해를 받지 않게 하셨습니다. 본문 중 신약 고후 3:16절 이후의 말씀과 관련되는 말씀이 하나님을 뵙고 십계명 돌판을 받아서 온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너무 나서 백성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향은 그처럼 어마어마 합니다. 비록 죄를 지은 똑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뵙게 되면 주님의 영광이 그 사람에게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영광스럽다는 것은 오해이고, 착각입니다. 그럴 수록 더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아무런 염려나 걱정없이 순종하고 충성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모세가 백성들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경배하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새겨주신 돌판을 깨어버렸으므로 다시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주님께서 한결 같으심을 알려 주십니다. 한결 같으시다는 것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주신 계명과 율례와 법도와 말씀을 지키시면 축복하시지만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네번째,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고 경배하여야 하는데 다른 종족과 혼인을 맺으면 그들이 주님의 사람을 유혹하여 주님을 배반하게 하므로 그들과의 혼인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반항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구약 성서를 읽으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서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이 아닙니다. 조건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주님만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와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하셔서 이땅에서도 복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소망 중에 들어가시길 축복합니다. 아멘하나님께서 얍복 강에서 야곱과 씨름을 하신 후에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분이 성인인 아빠가 어린 아들과 씨름을 하면 지겠냐고, 아빠를 이기겠다는 아들에게 져 준 것이지.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고, 형에서의 보복을 계속 두려워하자 그에게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셔서 그 마음에 무엇,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형 에서가 자기에게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호위 무사가 되겠다는 놀랄 만한 현실을 만나면서 자기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 하신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장해 가면서 매우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보호자가 되시는 증표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야곱에게 이름을 주신 것처럼 하나씩 주셨습니다. 바울은 목회하면서 새겨진 상처(스티그마)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것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본문에서도 모세는 주님께 떼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면 그들의 잘못 때문에 그들을 없앨 수 있으므로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이끌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져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기는 아들에게 져 주십니다. 당연히 이기시고, 이겨야 하는 아빠이지만 져 주시는 아빠는 좋은 아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빠이십니다. 모세는 거기다가 하나를 더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입증하시는 차원에서 자기에게 보여 달라고 우겼습니다. 모세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가시면 모세가 죽게 되므로 뒤로 지나가시겠다고 하시고 실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모세를 낙심하지도 않게 하시고, 하나님 역시 거룩하심을 지키셨습니다. 이런 결과를 스티브 코비란 사람은 윈윈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윈윈의 공식을 이미 3천 젼 전, 4천 년 전에 실행하셨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들의 철없는 떼라고 할까요? 그런 것까지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좋으신 아빠이십니다. 모세 역시 본인이 하나님께 떼를 쓴 것을 두고두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철없는 아들의 고집을 거절함으로 꺾지 않으십니다. 아들이 인정할 만큼의 방법으로 아들을 달리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아빠이십니다. 아빠이신 하나님이 늘 자랑스럽고 감사로 고백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Archives
May 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