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땅을 분배하는 과정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가나안을 모두 다 정복한 후에 땅을 분배하지 않고 약간만을 정복한 후에 땅을 분배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주님의 힘에 의하여 가나안의 일부를 정복하였듯이 각 지파 역시 주님을 믿고, 주님의 힘으로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땅을 차츰차츰 정복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승냥이와 같은 짐승들이 땅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조금씩 조금씩 땅을 정복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두번째, 주님의 일을 먼저 합니다.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언제나 이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집을 건축하고 마련하는 일 조금 늦어도 됩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여 주시는데 집과 직장을 늦게 마련하면 오히려 앞 사람들이나 상황을 고려하여 마련할 수 있으므로 훨씬 더 좋은 것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믿음으로 주님께 먼저 드렸으므로 매우 안정되고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로 다섯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준 후에 일곱 지파는 한참 후에야 땅을 분배받습니다. 그 이유는 길갈에 머물던 성막을 실로로 옮겨서 그곳에 성소를 건축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행한 일이 매우 질성 정연합니다. 하나님, 민족과 국가 그리고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여 줍니다. 세번째로, 자신들이 분배받을 땅에 대하여 충분히 검토하고 연구하게 하였습니다. 연구하고 기도하고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베푸시는 자비와 관용을 배울 수 있습니다. 넉넉하면서도 시간을 충분히 줍니다. 네번째는 제비를 뽑아서 불만이 없게 하였습니다. 제비를 뽑는다니까 그냥 무작위하게 뽑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질서가 없으시거나 사행심을 조장하지 않으십니다. 제비의 원칙은 지파의 사람 수를 기초로 하게 하셨습니다(참고, 민26:53~56). 예로 유다 지파는 5만 명이고, 앗셀 지파는 3만 명입니다. 그리고 요셉 지파 사람의 숫자가 수가 오만에 이른다고 가정합시다. 이 세 지파를 무작위하게 제비를 뽑아서 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만 명의 숫자에 맞는 땅 두 개를 선택할 때는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에게 제비를 뽑아서 선택하게 하였고, 이만 명의 지파에게는 이만 명에 알맞는 땅을 놓고 제비를 뽑아서 분배받도록 하셨습니다. 이만 명의 사람이 오만 명의 사람들이 분배받아야 할 땅을 제비 뽑도록 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몇 년 전부터 제비 뽑기, 제비 뽑기란 말을 사용하는데 아무런 원칙이 없는 제비 뽑기가 아닙니다. 물론 제비를 뽑는 것 자체가 원칙이 될 수 있는데 제비를 뽑는 기초과정도 있음을 이해함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교회에 장로를 제비 뽑을 때 장로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 요청하는 사람은 세 사람인데 장로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 다섯 사람 중에서 제비를 뽑아 세 사람만 선출하게 하는 것이 제비 뽑기의 기본입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제비를 뽑는다고 해서 자격이 없는 사람까지도 제비를 뽑아야 한다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제비 뽑기의 제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런 공정하고 시비가 없는 과정으로 땅을 분배하게 하셨습니다. 땅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땅을 분배받는 과정을 보면 시비나 원망과 불평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은혜로우시고 질서가 있으심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조심하고 주님의 인도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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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유다 지파가 받은 땅의 경계와 성격에 대하여 설명해 줍니다. 좋은 땅도 있었고, 이집트나 블레셋 가까운 지역의 땅도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블레셋 지역은 지중해 해안가로 비교적 비옥합니다. 그러나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야 했으므로 항상 위험하였습니다. 물론 이집트 가까운 곳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는 곳도 있고, 산간 지역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그래, 좋은 것이 있으면 좋지 않은 것고 있고, 좋지 않은 곳이라면 좋은 것도 있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좀더 깊게 말씀드리면 좋지 않은 곳, 좋지 않은 것에 대하여서는 더 열심히 기도하면서 주의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게 되고 자기를 개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것일 때는 그것을 통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늘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또 하나 마지막 절에서 유다 지파가 예루살렘 성에 살던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오랫 동안 유다 지파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이방 민족이 함께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민감하게 주의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또 하나 왜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힘이 없어서라면 문제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주님께서 대신 싸워주시는데 왜 그것이 안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 메시지를 붙잡읍시다. 하나는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자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일수록 더 믿음을 갖고 주님께 기도하자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생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요단 동편에서 모세에게 그곳의 땅을 분배받은 지파들도 있었지만 가나안에 와서 제일 먼저 땅을 분배받은 지파는 유다입니다. 본문은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땅을 설명하고, 수14장에서 여호수아에게 과거 45년 전에 모세로부터 약속받은 땅을 달라고 한 헤브론을 갈렙이 정복한 내용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들에서 몇 가지의 메시지가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땅은 넉넉하게 주실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유다가 먼저 받았다고 조바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처럼 욕심을 낼 필요도 없고, 땅을 먼저 받은 지파가 얼마나 받고, 자기가 받아야 할 것이 얼마인지를 조바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카투사로 차출이 되어서 평택에서 교육을 받고 가야할 부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한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한 부대는 육군 보병 부대와 탱크부대인데 그 부대를 가면 매우 고생을 할 것이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부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으로 대부분의 장정들이 근심을 하였습니다. 정작 그 부대라고 하면서 장정들을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니 한꺼번에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부대는 소문처럼 트럭을 갖고 와서 수 십명을 데리고 가는 부대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부대는 생전에 한번도 타보지 못한 세단을 갖고 와서 데리고 가는 분대도 있었습니다. 외관도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용산 미 팔군으로 갔는데 여러 명을 데리고 가서인지 밴을 타고 갔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나중에 장정들이 다시 모여서 소식들을 듣고보니 한 부대에 대한 소문은 가짜 뉴스였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군대 생활을 잘 하면서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매우 좋고 넉넉한 땅을 주실 것이므로 앞으로 받게 될 복과 땅에 대하여 누가 먼저 받은 것에 대하여 조바심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두번째의 메시지는 갈렙의 마음입니다. 갈렙의 딸은 아버지에게서 땅을 더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자기의 남편에게 전하였습니다. 아내의 요청을 받은 갈렙의 사위는 땅에다가 샘까지를 더 요청합니다. 그러자 갈렙은 그들의 요청에 땅은 물론이고 샘도 윗샘과 아랫샘까지도 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갈렙처럼 하나님께서도 더 많은 것을 주시고 싶어하시면서 주십니다. 넉넉하니까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번째의 메시지는 나이가 85세라고 하던 갈렙이 아낙 자손이 거주하던 헤브론을 점령하였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네, 갈렙은 점령하였습니다.라고 본문 15절과 16절에서 알려 줍니다. 갈렙이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본인은 힘이 있다고 하였지만 85세이 할아버지가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이 들려서 저 바다로 던져진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크고 민첩하고 용이 주도하여 젊어서도 그들 앞에서 메뚜기 같던 갈렙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85세가 다 된 갈렙에게 밥이 될 뿐입니다. 주님은 못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믿음을 갖고 오늘 하루도 승리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기업을 기뻐하며 넉넉하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갈렙을 향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그에 대하여 대체로 이방인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이 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게 이해하면 은혜가 더 됩니다. 그러나 갈렙의 어머니가 이방인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오히려 에돔 족속이라는 이해가 훨씬 더 은혜는 됩니다. 갈렙의 배경을 이해함도 믿음이 중요함을 설명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자신의 배경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유다 지파의 수장이 된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후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지칭하며 두려워하고 불평할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밥이라고 주장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들의 믿음과 주장을 들으면서 모세는 자네들이 밟은 땅을 주님께서 자네들과 자네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해 줍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장장 45년 동안 믿음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땅을 분배받을 때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그때 모세를 통해 주셨던 말씀을 하면서 그땅을 자기에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렙은 압니다. 사람의 나이, 건강, 경험, 지식보다 현실의 실력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잘 간직한 갈렙과 여호수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밟습니다. 그리고 갈렙은 모세를 통해 주신 헤브론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는 히1:1절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 믿음을 부서뜨리고 빼앗으려고 사탄은 수많은 방해들을 합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을 갖고 세상을 보면 능력을 갖게 되고, 그 능력으로 믿음을 지키면 주님의 말씀이 현실이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생각을 채웁시다. 그리고 현실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며 40년 45년과 같은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제 상식으로 수13장에 서 언급하시는 지역은 가나안 지역 중에서 지중해와 이집트로 연결된 곳이기 때문에 비교적 비옥한 땅들입니다. 그곳엔 크레타에서 이주한 블레셋 사람들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 안정되고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사는데 어려움이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여호수아의 군대는 그곳을 점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땅을 다른 가나안의 땅들처럼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6절 후반부의 말씀에서 주님게서 그들을 모두 쫓아낼 터이니 그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말씀을 들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그냥 차지하면 됩니다. 주님의 땅이고, 주인이신 주님께서 주신다고 하시고, 한 가지를 더 추가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본인의 땅에서 내 쫓아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당연히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경우를 쉽다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현실은 말씀드렸듯이 그곳에 사는 사람이 여지껏 만난 종족들 보다 강하고 우월합니다. 이미 40년 전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런 아낙 자손들을 향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밥이라고 하여서 말씀대로 지금 가나안 땅을 밟고 있습니다. 그런 생생한 증인을 보고 그들의 증언을 듣는다면 당연히 들어가서 살면 됩니다. 마치 범람한 요단강의 급류가 흐른다 하여도 그곳을 믿음으로 들어가서 그 중앙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현실이 너무 무섭고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홍해도 그렇게 요단강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 살라는 주님이 그 땅의 주인이시고, 우박과 바람 그리고 그 밖에 알지 못하는 것을 쫓아내실 수 있습니다. 여리고는 무엇으로 내려 앉게 하셨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서 돌기만 했는데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사람이 몰라도 현실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사람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에겐 기적이라도 하나님껜 그냥 하시는 자비로움이십니다. 주님의 말씀 듣기를 기다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끝이 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역사가 바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본문에는 모세가 정복한 요단강 동편의 왕들과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여호수아가 정복한 왕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모세가 동편에서 정복한 땅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가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정복한 왕들은 무려 서른 한 명이라고 합니다. 대단이 많은 숫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인도하셔서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여전히 정복해야 할 곳이 매우 많습니다. 앞으로도 언급되겠지만 믿음으로 앞으로 나가면 그냥 갖게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미국 중부 평원에서 땅을 소유하는 과정을 영화로 보니 가서 발로 밟고 줄을 치면 되더군요. 이 말씀을 드리니까 톨스토이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땅은 죽어서 묻힐 그만큼이라고 한 소설이 생각이 납니다. 땅 지주가 소작인에게 해 뜰 때부터 밟아서 해 질 때까지 돌아오는 땅을 모두 소작인에게 주겠다고 했답니다. 조건은 분명 해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답니다. 소작인이 잔뜩 기대를 하고 해가 뜰 때를 기다렸다가 정신없이 뛰고 걸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땅을 확보하였답니다. 돌아가야 할 것을 생각해서 뛰고 걷고 겨우 해가 지기 전에 지주에게 도착했답니다. 그랬는데 너무 과로를 했는지 그 앞에서 그만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답니다. 모두가 헛 일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묻힌 땅은 관이 들어가는 그만큼 뿐이었답니다. 인생이 차지하는 땅이란 결국 자기의 시신이 묻힐 관만한 크기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시신이 묻히지 않고 화장이 되어 가루로 됩니다. 예전에 우리가 어릴 때 어른들이 진지드실 때 사용하시던 사발에 찰 정도의 분말이 됩니다. 그 정도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인생은 그렇습니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고 열심히 하여도 그 정도 밖에 남는 것이 없음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요? 본문을 보면서 저는 땅에 대한 생각과 함께 전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남기는 것은 주님을 닮은 경건과 전도자와 양육자, 곧 제자입니다. 전도해야 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그동안 자기 안에 예수님을 닮은 경건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리고 전도를 몇 분이나 하셨나요? 집 자녀들을 비롯하여 일가 친척 통틀어서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한 사람들은 얼마나 되시지요? 주님은 우리가 차지하고 소유한 땅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닮은 경건과 전도한 사람, 제자로 양육한 사람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오늘부터 믿음의 땅을 위해서 기도하며 땀을 흘리는 지혜가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여호수아는 작전을 짜고 지시만 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나가서 전투를 합니다. 본문을 읽으시면 알겠지만 성서 기자가 본문에서 반복해서 알려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무려 여섯 번을 반복합니다. 이 말은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받은 혜택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승리를 하는데 그가 잘 해서 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 주셨습니다. 도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두번째는 필요없는 자랑이나 변명을 하지 않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혁혁한 공로를 한번도 아니고 많이 세웠습니다. 공로를 많이 세운 사람에게 자랑은 오히려 폄하거리가 됩니다. 물론 공로를 많이 세웠고, 최선을 다해서 수고하였으므로 변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번째로는 지도자의 무한 신뢰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와 복음을 위해 희생한 사람은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급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지도자의 신뢰와 인정을 받게 되어서 살 맛이 나게 됩니다. 네번째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알게 됩니다. 이유는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한 두번이 아니라 계속하면서 주님의 뜻을 순종하여 실천하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지도자와 함께 하면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입은 용사들은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주님이 주신 땅을 정복하는 기쁨을 받는 복을 누렸습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 하지 않는 사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편에 계십니까? 하지 않는 사람 뭐라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만 잘 하면 됩니다. 주님은 하는 사람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부족한 헌신과 봉사를 가릴 이유도 없고 말할 시간이 없습니다. 주님의 일에 기쁨을 갖고 참석하여 주님이 주시는 복과 혜택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하나님께서 내리신 우박으로 우왕자왕하는 연합군을 대패시킨 여호수아의 정예병들을 피해 연합군의 다섯 왕은 급해서 동굴로 급하게 피신하였습니다. 병사들을 이끌어야 할 왕들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동굴에 가둔 후에 전쟁을 깨끗이 정리하고 그들을 끌고 나옵니다. 끌고 나온 왕들을 지휘관들에게 무자비하게 처벌하도록 합니다. 그들을 쳐서 죽인 후에 한 명씩 다섯 나무에 메달아 두게 하였습니다. 지난번 8장(29절)에서 아이성의 왕도 그렇게 나무에 메달아 두었다가 저녁 때야 풀어주었습니다. 왜 이렇게 전쟁에서 이기면 적장들을 메달아서 나무에 메달아 두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자신들을 대항하면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알리리려는 의도였습니다. 소위 위화감을 조장하면서 한편으로 자신들이 이만큼 위대함을 나타내며 자신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무에 메달린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무와 십자가를 좋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적장들이 죽어서 나무에 메달린 수치와 모욕을 보인 것과 같습니다. 네, 예수님께서 나무에 메달려서 죽으신 것은 수치와 모욕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욕과 수치를 지으신 것은 우리의 죄라고 알려 주십니다. 피흘리고 죽으심 역시 우리의 죄를 갚아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십자가는 시리아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네, 그 이전에 나무에 메달아 죽이는 관습은 이렇게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셨지만 반역자들이 처형을 당하심처럼 나무에 메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만큼 심각하였습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악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시기 나무에 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고 자신의 죄에서 풀려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죄를 갚아주신 예수님의 피와 죽음을 생각하면서 죄성, 죄의 습관에서 풀려나시길 축복합니다. 자신을 죄성과 죄의 습관에 가두지 마시고 이제는 죄와 관계없는 은혜와 능력으로 사시길 축복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므로 죄와 죄의 습관을 벗어나서 성결과 거룩의 사람으로 계속 장성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고 성화하도록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매일 죽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죄와 죄의 습관과 같은 더럽고 어두움에서 죽고 매일 새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거듭나서 주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본문에 제목을 붙인다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 하나님의 무기, 아우야, 기다려라, 신의의 사나이, 등등 오늘 말씀을 읽는 분께서도 본인의 제목을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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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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