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의 말씀에 이따금씩 왕에 대한 시가 나옵니다. 그 시가 왕이 아닌 자신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넘어서게 하기 위하여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알려 주시고, 벧전 2:9절의 말씀에서는 왕과 같은 제사장이라고 꼭 찝어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정확히 맞는 것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으니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이고 나아가서 왕이나 공주일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왕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을 왕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왕임을 인식하고 본문이 하시는 좋은 왕이 누구인지를 알아 보십시다. 제가 세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는 백성에게 복을 끼치는 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예전에도 나라가 잘 되면 왕 덕택으로 돌렸고, 재앙이나 전쟁, 기근이 와도 왕 탓으로 돌렸습니다. 왕 덕분으로 백성과 나라에 복이 왔다고 노래하게 하는 왕이 좋은 왕입니다. 두번째로 좋은 왕은 백성들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는 왕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이 불의하게 재판을 받았다라는 마음을 갖지 않고 공정하게 재판을 받았다는 마음을 들게 하여야 합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없어서 혹은 권력자 때문에 내가 부당하게 대우를 받았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심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왕이어야 합니다. 왕의 자리와 권한과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스스로 가진 것은 없어지게 되고 안 빼앗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왕위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관리하시므로 왕의 자리나 권결과 권한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으로 나라와 백성을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늘 보고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왕이 되는 길들입니다. 왕이라는 마음을 갖고 나 때문에 가정과 공동체가 주님께 복을 받아서 잘 되고, 내가 있는 곳에서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이 불평하다는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고, 주님을 두려워하며 주님께 정성과 힘을 다해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일이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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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신앙 생활해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집안이 신앙인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인생의 높고 낮은 길이 있고, 시인이 본문에서 밝히듯이 어려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알려 주신 것처럼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듯이 사탄이 믿음있는 사람을 구원의 길에서 떨어뜨리려고 늘 지키고 시험하고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 여정을 끝내고 머리에 서리가 내린 나이까지 주님을 섬기고 있답니다. 이제 남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금식으로 준비를 하셨습니다. 금식을 마치자 사탄이 와서 시험을 하였지만 보기 좋게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시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당신부터 구원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되는데 사탄은 예수님께서 죽는 것을 극구 반대하며 죽지 않도록 시험하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머리에 서리가 내려서 검은 머리칼이 없어지고 머리 칼로 덮여도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핑개와 이유로 믿음에서 떠밀며 내려가게 할 것입니다. 그래도 여호수아는 나와 내 집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멈추는 죄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아직 아닙니다. 다 되었다는 순간 바로 시험과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10:12절을 통해서 선 줄로 아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숨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주님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이시고 도움이십니다. 라는 믿음과 확신과 고백이 마음과 입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일생 동안 믿어온 믿음이 어느 순간에 멈춘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현실이 됩니다. 숨이 멈추어지는 그날까지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마지막 남은 힘과 숨과 소리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품에 안기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시인은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고백하며 소개합니다. 그 관계는 어머니 뱃속으로 거술러 올라 갑니다. 주님은 시인을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보호하여 주셨고, 받아주셨답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서 건져주시고, 잔인한 폭력배의 손에서 건져 주셨답니다. 비난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든든한 피난처가 되어 주셨듭니다. 헐뜯고, 생명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건져 주셨답니다. 시인을 고발하고 음해하고 자들에게서 그리고 제거하려는 자들에게서 건져 주셨답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시인을 음해하거 제거하려는 자들을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셨답니다. 그런 주님이시기에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왔으며 언제나 찬양을 한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구원하신 일을 알리겠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능력을 찬양하겠답니다. 본인을 시인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께서 본인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 보십시다. 구원하여 주시고, 안정되게 유지시켜 주시고,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셨습니다. 많은 불의와 음모와 음해 나아가서 악과 폭력에서 보호하시고 건져 주셨습니다. 본인이 그런 주님께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다. 주님을 찬양합니까? 주님을 자기의 희망으로 알고 삽니까? 성전에서 주님의 구원과 은혜를 힘껏 찬양합니까? 네, 힘껏 그리고 온 힘으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본문을 다윗이 기록하였으므로 다윗이 위기 상황에서 부르짖을 때 보호받았던 장면들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골리앗이라는 블레셋 장군으로부터 구원하여 줍니다. 그것을 계기로 사울의 장군이 됩니다. 문제는 다윗의 혁혁한 공로를 알아차린 백성들이 사울보다 다윗을 칭송하였던 것에서 시기가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적은 수천 명이고, 다윗이 죽인 사람은 수만 명이다. "라고 백성들의 정서를 노래합니다. 그것으로 시기심이 발동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블레셋 남자를 죽이고, 그들의 포피 2백개를 가지고 오면 사위가 되게 하겠다고 합니다. 다윗이 명령을 수행한 후 미갈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다윗을 사랑하게 된 미갈은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의 계획을 수포로 만듭니다(삼상 19:17). 이후로 노골적으로 다윗을 잡아 처형하려고 사울은 다윗을 추격합니다. 사울의 추격을 받던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의 수색이 코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말 그대로 다윗은 독 안의 든 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동굴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사울이 안다면 다윗을 사로잡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입구에 불을 놓으면 연기를 참지못하고 다윗이 튀어 나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사울이 다윗의 밥이 되어 나타납니다. 사울이 뒤가 급해서 동굴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바로 다윗이 숨어 있던 곳입니다.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온 사울은 그 안을 전혀 보지 못했지만 그곳에 오래 있었던 다윗은 사울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우연이었다면 신 광야 하길라 산에서의 낮잠은 어떤 현상일까요? 위기에 처한 다윗은 그때마다 주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위기를 벗어난 일은 사울의 추격에서 보호를 받은 것만이 아닙니다.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갔을 때의 일, 그리고 왕이 된 후에 아들 압살롬이 정변을 일으켰고 그의 책사로 당대 최고의 아히도벨이 되었으나 다윗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무력화하게 하여 주신 일 등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많은 위기 속에서 그를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당하는 위기를 깔깔대며 수모하던 자들이 오히려 반대가 된 사건들이 된 일들이 생각납니다. 바벨론에서 느브갓네살 왕이 자기를 위한 커다른 금 신상을 만들고 모든 백성들이 절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을 하지 않습니다. 화가 난 왕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고 그 용광로에 세 친구를 던져 넣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백대로 주님께서 그들의 털끝 하나 그슬르지 않게 하시고 불 냄새도 나지 않게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겁이 난 느브갓네살 왕이 무시하던 그들을 존경하면서 하나님이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무시하는 자들은 그 자손들 모두를 죽여서 거름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을 하게 하십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사건에서도 아말렉과 아각의 후손 하만이 기세가 등등하여 유대인인 모르드개와 그 민족 모두를 학살할 계획을 하지만 금식을 하고 죽으면 죽겠다는 에스더와 유대 민족의 고백과 믿음을 보호하셔서 오히려 하만과 아각의 후손들을 학살하는 그런 일을 페르시아에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위기에서 상황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일을 성서가 자세히 알려 주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위기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자녀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리고 당하게도 하지 않으십니다. 매우 자세히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위기를 역전시켜 주십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이시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위기를 승리의 기회로 만들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널리 알리는 믿음과 승리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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