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서 앗시리아를 레바논의 백향목이라고 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백향목 보다도 좋았고, 잣나무들도 굵은 가지들에 비하여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풍나무들도 비교가 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그 어느 나무도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아름답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나무들이 레바논의 백향목을 부러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키가 크고 아름다워서 마음이 교만해 졌답니다. 주님은 교만하게 되면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므로 레바논의 백향목을 꺾어서 내다 버리셨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큰 키와 큰 가지가 문제가 되어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고 잠언 16:18절에서 알려 주고, 잠18:12절에서도 사람의 마음이 오만하면 멸망이 뒤따르지만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에덴의 나무들보다 크고 아름다웠지만 교만하자 부러지고 크고 아름다운 것들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없을까요? 자신의 존재가 한갖 바람에 나는 티끌, 흙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장례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치집에 있다(전7:4)고 하였습니다. 키가 크고 아름답지는 않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음이 복입니다. 물론 본인은 자신을 그다지 크고 아름답게 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예쁘고 크고 멋지게 보십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기쁘고 보람되게 살면서 겸손하므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쁨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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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주님은 이집트를 파멸시키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이집트 주위에서 이집트를 의지하고 있던 에티오피아, 리비아, 리디야 그리고 아라비아와 굽과 같은 이집트의 동맹 나라들도 이집트와 함께 쓰러뜨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집트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우상숭배와 같은 죄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왔다면 그런 어려움들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도 하나님과 관련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면 왜 바벨론만을 주님께서 활용하셔서 이집트와 그 동맹들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것일까요? 주님께는 바벨론만이 아닙니다. 단지 바벨론이 당시의 형세에서 크고 힘이 있는 나라로 자라났기 때문에 그들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바벨론도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이런 현상들을 통하여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든 나쁜 관계든 이스라엘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들이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이시라는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다스리시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그 인접국가들 나아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자신들까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갔어야 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단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고 심판하시지만은 않으십니다. 민족과 개인이 하는 일을 통해서 심판하십니다. 바벨론을 비롯하여 이집트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까지 그곳에 살던 여러 이방 민족들 모두에게는 우상숭배와 폭력과 같은 죄악이 무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유없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악을 범하는 자들을 심판하심으로써 불의를 행하면 온전하지 못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모르고 잔인하고 불법을 행하는 바벨론을 두둔하시거나 보호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힘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그들을 사용하시고 또한 그들까지를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리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정의와 공의임을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런 회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은 물론이고 이집트와 이집트의 동맹국 그리고 이스라엘 모두를 평화롭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공격을 당하고 힘없이 무너지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통해서 어렵고 힘든 그 상황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와서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믿음으로 회복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아프리카의 북쪽에 위치한 이집트는 역사도 오래되었고, 역사와 함께 문명도 오래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집트에서 성취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이집트가 그처럼 큰 나라로서 오래된 역사와 문명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은 이집트 중앙에 흐르는 나일 강이라는 물줄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이지 않고 흐르는 나일강을 마르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칭, 타칭 나일 강을 호령하던 악어를 광야에 내다던지셔서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 현상을 역사적으로 이집트를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패배를 하여 그들의 지배를 받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집트가 무너지는 현상을 통해서 이집트를 의지하려는 이스라엘의 희망을 꺾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 때 자기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눈에 보이는 민족이나 사람과 같은 요소들을 찾고 찾으면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현상들을 용납하지 않고 하나님께 찾아와서 하나님께 받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 해결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도 해야 하고,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과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이 주신 계명과 말씀들을 순종해야 하는데 한눈을 파는 동안 그렇게 하지 못한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하면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시고 기뻐하시면 도와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탕자를 새롭게 새워주심처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십니다. 이집트도 그렇고 이집트를 무력화시키는 바벨론도 그렇고 모두 한 때 있다가 없어지는 하나님의 도구들일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와 힘과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준수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안팎이 평안하고, 다른 사람과도 평화롭게 지내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주님은 두로 왕을 다니엘 보다 슬기롭다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비밀스러운 것까지 안다고 합니다. 그런 재산과 총명으로 재산을 모았고, 그가 자신의 창고에 금과 은을 쌓았다고 합니다. 무역을 해도 큰 지혜를 가지고 하여서 그의 재산을 늘려 갔다고 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재산 때문에 교만해 졌다고 합니다. 여기까집니다. 교만하면 사람도 싫어하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안 변할 순 없을까요?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은 것을 쌓으면서도 겸손히 덕을 끼치고 섬길 순 없을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교만하게 되는 것을 보면 지혜에 아직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겠죠? 자기가 쌓은 것으로 마음이 교만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변화를 모르기 때문일 테고 더 분명한 죽음이 자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일테죠? 전도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자기를 기다릴 뿐 아니라 자기가 이룩해 놓고 쌓아놓은 것을 자기가 원하는 자식이나 원하는 사람이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을 안다면 잘 나누겠죠? 나눌 때도 겸손히. 이유는 겸손하지 않으면 나누어주어야 할 사람이 곁을 떠나서 주위에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죽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죽을 때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것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살아서 그런 일을 할 것이고, 죽는 것을 안다면 교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두로도 그렇고 솔로몬도 그렇고 모두 지혜로웠습니다. 부자였습니다. 물론 권세도 컸겠죠? 그런데 변했습니다. 변하는 것이 문젭니다. 좀 나아지면 변합니다. 안 변할 수 없을까요? 하하하. 많이 알고 이것저것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겸손함이 있는 사람은 없을까요? 미련한 사람을 보면 상대적으로 조금 더 가지고 조금 더 아는 것으로 인하여 교만하고 잘 난척하고 그렇습니다. 모릅니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자부할지 그런데 옆의 사람은 그렇게 보입니다. 그렇게 보는 눈이 잘못된 것일까요?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교만하다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평가하는 것 자체가 교만할 수도 있고 그가 두려워하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 평가하는 것을 금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크고 힘든 과제가 있습니다.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게 됨을 생각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나누어야 하는 과제가 더 많아짐을 그래서 숙제를 못한 학생처럼 바쁘고 미안해 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갖고 있으면 교만할 여가가 없겠죠? 사실 교만하지 않으면 자신이 남기고 가는 재산이나 업적 때문에 미안한 마음을 갖겠죠? 이유는 자기가 해야 할 숙제를 마치지 못한 것을 송구하게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오늘 아침에 제가 깨닫는 것 한 가지가 생겼습니다. 교만하지 않으려면 숙제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있는 것들을 정리하는 마음과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나누고 세워주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숙제 열심히 하므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을 유지하므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주님께 충성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혹시 두로에 대하여 기억 나는 것이 있으십니까? 두로는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을 때 그리고 자기 궁전을 비롯하여 큰 건물들을 지을 때 나무를 공급했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에 백향목을 제공했던 나라입니다. 해안 국가로서 땅이 비옥하고 상업이 발전했던 나라였습니다. 농산물, 임업, 상업이 발달한 나라였으니까 잘 사는 나라였다는 말입니다. 그랬던 나라인데 그 나라를 향해서 심판을 예언하게 하십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망할 때 주변의 나라로서 반사격으로 자기들이 잘 될 것이라고 공언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한 때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당신이 형님이요, 내가 아우하면서 하면서 좋은 관계를 표현하였으면서도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기뻐하였다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표면상은 우의를 말하면서 속내는 망하기를 바란 그들의 정체를 아시고 그들 역시 유다를 망하게 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망하게 하고 그들이 쌓았던 발전과 문명과 수고를 한 순간에 무너지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미국이 당시는 중공과 수교를 열면서 그 일을 성사시킨 키신저가 한 말로 기억을 합니다. 앞으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기억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양국이 탁구로 문을 열더니 국가끼리도 문을 열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말로 중공의 실제를 인정하여서 유엔 안보리의 국가로 인정하였고, 나라의 이름도 중공이 아니라 중국으로 바꾸어 불러주었습니다. 요즈음은 다시 중국을 압박하며 공격을 하는 분위기인데 워낙 많은 것들이 연관되어 있어서 미국으로서도 중국을 몰아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키신저의 이야기는 성서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한번 맺은 관계는 신의로 지키되 맺는 관계는 정의로워야 한다가 성서적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면 그들이 누구이든지 손을 잡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적으로 돌리는 것은 결국 부매랑이 되어서 자기를 황폐화 시키는 것도 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관계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관계를 맺을 때도 손실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맺고 그렇게 맺은 관계는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관계입니다. 특히 사람관계는 더 그렇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친구 사이의 신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고 사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사람과 함께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건설해 가는 그런 신의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이랬다 저랬다 이리 갔다 저리갔다하는 관계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관계가 아닙니다. 특히 주 안에서 신의를 맺은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함께 돕고 함께 회복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그를 도우십니다. 관계를 시작할 때 주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힘이 있으니까, 도움이 될 듯하니까 관계를 하고 자신에게 유익이 될 것 같지 않으면 끊어버리는 관계는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두로에게 내리신 심판을 내리십니다. 주 안에서 믿음으로 한번 맺은 관계를 신의로 지키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우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우리가 알듯이 암몬과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예입니다. 그 시작이 그리 은혜롭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 종족들이 되었습니다. 열등감이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시기심이 있어서일까요? 이스라엘의 변방에 살면서 그들이 망할 때 박장대소하듯이 좋아했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심판을 선고 하십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로 이스라엘, 곧 야곱의 형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에 왕의 대로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불편을 주었습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맺지 않고 해를 주고자 한 나라입니다. 자신들의 조상인 에서가 행한 과오를 보면 알텐데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을 보면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고 대적하여 온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 모두를 아시고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블레셋은 가나안의 지중해 연안에 살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입니다. 블레셋의 기원은 크레데타는 섬에서 가나안으로 유입해온 종종들이라는 설과 에게해 문명 권에 살던 해양 종족들이 해안 지역을 따라 가나안 지중해 연안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보다는 문명이 발달해서 그들은 나은 힘으로 이스라엘을 사사기 시대부터 많이 괴롭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대적관계에 있어온 블레셋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주위의 나라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으 들으면서 몇 가지 메시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 잘못될 때 동정해야지 잘못된 것을 잘 되었다고 박장대소하는 것은 자비롭지 못한 짓임을 알려 주십니다. 과거 좋지 않은 관계였어도 화해하고 잘 지내며 협조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배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몇 차례 알려 주었듯이 그들의 성품과 성량이 잘못되었어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세우신 사람이나 민족을 비난하고 박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므로 오히려 베풀며 돕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나 종족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심판하심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열등감, 과거의 쓴 뿌리, 나쁜 감정 모두 내다 버리고 평화롭고 좋은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현명한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제가 본문의 제목을 '에스겔의 아내가 죽다'로 기록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확실하게 알려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겠다고 에스겔에게 알려 주시고, 그렇게 시행하셨습니다. 이 일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첫째로 드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믿음을 그만큼 인정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에스겔에게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이 사랑하는 아내를 데리고 가셔도 될 만큼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이셨습니다. 두번째로 드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예루살렘의 죄와 심판에 대하여 그만큼 진지하심을 알려 주셨다는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과 에스겔을 비롯한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전하는 종들은 그만큼 진지하고 위급한데 정작 죄를 짓고 심판과 징계를 받아야 하는 당사자들은 먼 산의 불구경을 하는 것과 같다는 마음이 듭니다. 셋째로 드는 생각은 에스겔이나 주님의 종들이 가져야 할 세상에 대한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면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마음이 아플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세상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도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회복되고 만날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아내가 죽은 후에 속으로 비통해 하지 겉으로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고, 모습도 슬픔을 나타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미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심판과 징계를 받을 때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 하던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거나 애도를 표현할 시간과 여유가 없게 될 것임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요즈음은 티비나 동영상 여러가지 시청각 교제들을 통해서 본인이 알고 싶고 가고 싶은 명소나 유명한 지역에 대한 곳들을 미리 보고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즈음처럼 종들의 삶을 통해 유대 인들이 받아야 할 심판과 징계의 처절함과 아픔과 슬픔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방송들이 여행할 곳을 보여주면서 그곳에 대한 지식과 기쁨과 기대감을 준다면 하나님께서 종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아픔의 현실들은 그때를 보면서 회개하여 죄에서 돌아서게 하기 위한 경고입니다. 이렇게 하여 주시는데도 깨닫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는다면 경고하신 대로 도와주시지 않음은 물론이고 도와달라는 저들의 소리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현 모습은 어떻습니까? 현실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고난받을 때 주님이 들으시고 도우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깨닫지도 않고 들어도 듣지 않은 것처럼 하면 아픈 현실을 당한 그 때를 외면하십니다. 에스겔의 아내가 죽은 것을 보고 병으로, 사고로, 스트레스로 죽었다면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들을 외면하는 불신이 없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주님께서 에스겔에게 가마솥을 준비하여 그 안에 살고기와 뼈가 있는 다양한 고기들을 넣은 후에 장작불을 지피라고 하십니다. 맛있는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불을 크게 지펴서 그냥 타서 찌들 때까지 불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한번은 스토브에 고기가 든 솥을 올려 놓은 것을 잊어버리고 나가 있다가 그 안에 있는 고기는 물론이고 뼈까지도 태웠던 적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에야 생각이 나서 얼른 문을 열어보니 다행히 불은 나지 않았지만 부엌에 연기가 가득하고 고기와 뼈 타는 냄새가 고약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탄 솥을 그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 이스라엘이 지은 음란과 폭력과 우상 숭배를 한 죄의 모습이랍니다. 잘 닦이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들이 닦이지 않는 것과 같답니다. 겉은 뻔지르하게 화장을 하였다 하여도 그가 누구인지를 더럽고 냄새나는 모습으로 알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잘못됨을 하루 속히 회개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지혜가 있으시길 추복합니다. 아멘.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예언자를 책망하십니다. 예언자들은 음모를 꾸미고,생명을 죽이고, 재산과 보화를 탈취하며 과부들이 많아지게 한답니다. 제사장들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주님의 율법을 위반하고, 주님의 물건들을 더럽혔답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분하도록 깨우쳐 주지 않았고, 주님의 안식일을 눈감아 버려서 주님이 그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하게 하였답니다. 그들의 지도자, 곧 정치 지도자이겠죠? 그들은 먹이를 뜯는 이리 떼와 같아서 불의한 이득을 얻으려고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파멸시켰답니다.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주며 속임수로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그들에게 거짓으로 점을 쳐 주며 주님이 하니 않았는데도 주님의 말이라고 하면서 전하였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폭력을 휘두르고 강탈을 일삼는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을 압제하며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한 사람도 자기 땅을 지키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용광로의 찌꺼기들과 함께 섞어서 모두 녹여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힘들고 아파야 그제서야 주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에 주의하십시다. 아프고 힘들 때야 비로소 주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깨닫는 정도도 괜찮습니다. 회개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아프고 힘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한 사람도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유념해서 자기만이라도 주님을 바라면서 회개하고 온전함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이 지는 죄들을 본문에서 열거하여 주십니다.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백성들을 죽이고, 우상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더럽혔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며 나그네를 학대하고, 고아와 과부를 구박하였다. 주님의 거룩한 물건들을 업신여겼고, 안식일을 더렵힌다. 아버지의 아내인 계모와 음행을 하고, 월경을 하고 있는 아내와 관계를 한다. 이웃 사람의 아내와 더러운 죄를 짓고, 자기의 며느리를 음행한다. 자기의 누이를 욕보이는 자가 있다. 돈을 받고, 살인을 하며 고리대금업을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를 간단히 보니까 우상숭배, 살인, 성범죄, 그리고 경제적인 죄악들과 하나님의 것에 대한 범죄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범하는 죄악에는 주님의 것을 업신여기는 것과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랍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고아와 과부를 구박하는 것도 해당됩니다. 요즈음에 갑질 하는 행위들이겠죠? 그리고 아내가 월경 중에 관계를 하는 것도 본문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고리대금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부족한 자들에게 그리고 돈을 요청하는 자들에게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갚아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 주님의 백성이 고리대금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모은 돈을 사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의 자식도 못사용하고 모르는 사람이 사용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우상숭배, 살인, 간음, 우리가 모두 아는 죄들입니다. 거기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구박하는 것 죄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것을 업신여기는 것,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까지 포함됨을 기억합시다. 죄짓는 것 멈추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벌어서 사용해야 하는데 쓰지도 못하고 자식도 못쓰고, 엄한 사람이 쓰게 하신답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본인에게 해당하는 죄들이 있으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서 주님과 평안하고 즐거운 관계를 이루어가시며,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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