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나 위기가 왔을 때 부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첫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검토하면서 본인도 그 말씀을 함께 듣겠습니다. 첫째,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바울의 서신 여러 곳에 나오는 말씀이고, 베드로 사도 역시 사탄의 공격을 막기 위해 깨어 있으라(벧전5:8)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역시 게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희생을 앞에 두고 기도하시면서 동행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도 깨어 있어야 할 것이 기도인지 아니면 사역인지 그 외에 무엇인지를 검토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어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기쁨으로 뵐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두번째는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합니다. 흔들림 없이 믿음에 굳게 서 있음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흔들림 없이 믿음에 든든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강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비가오고 가뭄이 와도 걱정하지 않고 푸른 잎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 서의 말씀에서는 부활신앙이 가득하게 되면 흔들림이 없다(고전15:58)고 알려 주었습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흔들리거나 넘어졌다가 빠졌거나 그런 불상사가 없이 꾸준한 사람이 좋지 않습니까?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믿음은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세번째로는 용감하십시오. 입니다. 담대함과 같은 말입니다. 담대하고 용감할 수 있음은 근거가 배경이 자신이나 사람이 아니고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는 용감함과 담대함이 자기를 지탱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네번째는 힘을 내십시오. 입니다. 어떻게 해야 힘을 냅니까?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주님께서 힘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이 권면은 수없이 많이 들은 말씀이지만 정답입니다.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넘치는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힘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허황된 말씀을 하시지도 않고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성령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순종하면 힘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한 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교인들을 섬기게 된 사역자, 목회자인 스데바나의 가정에게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목회자, 사역자는 주님께서 돌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하라고 보내시고 한 집에 머물면서 그 집을 중심으로 사역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다윗 성으로 법궤를 옮기기 전에 아비나답 가정에서 수 십년 법궤를 돌보았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주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다윗 왕의 마음을 따르다가 아들 웃사가 즉사를 합니다. 그러나 오벳에돔의 경우는 단지 몇 달만을 돌보았을 뿐인데 주님께서 그 가정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주님의 것은 모두가 성스러운 물건이고 사람입니다. 잘 섬기고 돌보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맡기신 일을 소홀히 대하는 사람이 있고, 귀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인이나 사람의 시각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과 마음에서 보려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결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들 중에 어느 말씀이 본인에게 들려 지십니까? 꼭 그렇게 행하십시오. 6월 마지막 날, 코로나바이러스 상황 중에서도 한 달을 안전하게 지켜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영적으로도 안전하고 든든하게 지켜 주시고, 소망이 넘치게 하여 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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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왜 헌금을 하게 하실까요? 본문에서도 헌금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6:21)'고 하시면서 헌금 하는 것을 권장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헌금을 말씀하셨습니다. 각종 제사를 드릴 때에도 재물을 바치게 하셨고, 성전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서도 일반 성전 헌금을 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십일조도 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헌금과 다른 종류입니다. 그러면 왜 헌금을 하게 하실까요? 첫째,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게서 왜 헌금을 하라고 하실까요? 지금부터의 설명은 저의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교회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것입니다. 당연히 책임과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이 있는 사람은 많이 하고, 적게 있는 사람은 적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본인의 책임 그리고 관심이 있으면 할 것입니다. 주인이고,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맡아서 관리하라고 하셨는데 그것마져 주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헌금을 하시도록 개인과 가정에 그것 이상의 충분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헌금을 하는 두번째 이유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에서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선교도 좋고, 사역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본은 자기를 보내서 세우게 하시는 교회 나아가서 자신이 소속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본인이 해야 할 것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의 기본이 헌금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엔 왜 그렇게 많은 헌금 봉투가 있냐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 교회만 하여도 일반 헌금 봉투가 있는데 거기엔 주정 헌금, 주일 헌금, 감사헌금, 지정헌금, 십일조 등등의 이름이 적혀 있고, 또한 특별한 때에 드리는 부활절 감사헌금, 추수감사절 헌금, 성탄절 헌금, 신년 감사헌금과 같은 특별헌금 봉투가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헌금을 할 때는 각종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 따라서 헌금을 하다보니 헌금 봉투의 종류가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헌금 봉투를 어떻게 생각하실 까요? 저는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헌신을 창의적으로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의 결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쉽게 생각하면 은혜가 많으면 많이 드리고 싶어집니다. 없어도 드리고 싶습니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것을 모두 주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인데 그런 마음이 꾸준하다는 것은 보통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십일조는 어떻습니까? 어느 분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음을 믿는 사람에겐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먹을 것, 입을 것, 살 것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하셨는데 그것마져 드리지 않는다면 모두 가지고 가셔야 하겠죠?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니까요? 십일조를 두고 주님께서는 몇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바치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두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치는 사람에게는 바치는 믿음을 보시고, 더 많은 것으로 돌려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둑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헌금에 대해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서 안 드리는 사람에게 헌금의 이야기는 시험거리만이 될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드리지 말라는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믿음대로 하시라는 말씀도 안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고 넉넉하고 풍종하게 살고 싶으시면 바쳐 보십시오. 믿음 이상으로 주님께서 충분히 주시고, 풍족함을 누리고 살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헌금을 하면서도 헌금 때문에 시험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되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헌금은 기쁜 마음에서 정성껏 드리면 좋습니다. 주님께서 많은 것을 주시면서 그것으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운영하라고 하셨는데 교회와 주님의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직접 주셔야 하지 않냐고 믿음 바깥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와 주님의 나라를 운영하도록 본인에게 재물과 건강과 재능을 주셨다는 말씀을 이 자리를 빌어서 드리겠습니다. 헌금 때문에 본인의 믿음이 인정을 받고, 헌금으로 인하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바울을 통해서 증거한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건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도 부활할 것임을 믿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믿습니까? 아멘. 이제 주 안에서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부활은 육신이 죽은 자에게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도 예수님께서 오실 때 믿음으로 마라나타 고백을 하면서 주님의 품에 안 깁니다. 죽을 때라는 말은 갈2:20이나 롬6장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서 본인이 사는 것이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시겠죠? 물론 본인이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다가 육체가 죽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역시 죽음(또는 잠)이라는 휴식을 취하다가 주님 오실 때 맞이하게 된다(살전4:16)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본문에서 썩지 않을 몸을 취하고 있어야 부활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두번째로, 죽지 않을 몸을 입고 있던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여 주님의 부활 잔치에 참석하게 됩니다. 더 이상 죽음이 그와 관계가 없어집니다. 세번째의 메시지는 부활을 믿고, 부활을 내다보면서 이 세상의 일에 마음과 몸을 빼앗기지 말고 흔들리지 주님의 일을 많이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갈 것을 보증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답게 의심을 하면서 흔들리지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흔들리지 말고 일관되고 든든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일들을 더욱 많이 하라고 하십니다. 네, 더욱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하는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 믿음, 이 말씀을 전하는 바울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님 오실 그날까지 많이 수고하여서 기쁨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본문은 부활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으로 부활 후에 어떤 모습을 띨까를 알려 줍니다. 이 내용을 알려 주기 위하여 씨앗과 식물로 설명을 해 줍니다. 씨앗을 심으면 씨앗이 죽고 새로운 새싹이 올라옵니다. 마찬 가지로 육신의 몸도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씨앗 속에 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흙으로 왔으므로 죽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으므로 하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생명으로 살고, 흙의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이므로 땅의 생명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로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 후에 하늘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예수를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 이후의 영의 사람을 기대합니다. 물론 사는 동안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본인이 영원히 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맞는 생활을 합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도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늘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에 가득한 하늘의 삶, 영원한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확신하는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죽는 마음과 자세로 최고로 성실하게 산다는 그 말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그런 마음 자세로 사는 것이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할 사람의 바른 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사람처럼 멋진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한번 있는 인생 멋지고, 의미있게 살자면서 그렇게 죽음을 넘어서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요한계시록에서 알려 줍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심판의 책에 기록된 사람은 지옥의 부활을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를 본문에서 설명하여 줍니다. 일찍이 인류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령으로 내리신 죄를 지어서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지은 인류를 위해 희생하시고, 죄를 갚아주심으로써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죽었던 육신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인류의 시조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본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도 그리고 죽어도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다 죽는 마음자세로 삽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해 죽고 누구를 위해 사는가입니다. 누구를 위해 삽니까? 본인에게 죄와 죽음의 굴레를 풀어주신 주님을 위해 살고 죽습니까? 아니면 내일 일을 모르는 자신을 위해서 살고 죽습니까? 자신을 위해 살고 죽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서 늘 불안하고 걱정하며 삽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소망도 밝고 분명하며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살고 죽는 사람이 지혜롭고 현명하며 능력도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갖고 주를 위해 살아서 담대하고 유익하게 사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그들에게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희생이 인류를 죄에서 탕감하여 주심으로써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계획과 사업이심을 믿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만약에 믿지 않는다면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언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적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사업이셨음을 믿는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음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부활시키셨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부활함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답해야 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인가? 지금 사람들은 수명이 다 되면 육신이 죽습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영원히 살게 됩니까? 영으로? 구약이나 신약에 영으로 영원히 산다는 말씀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영으로 데리고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고백하며 선언했던 그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십시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저의 부족한 글을 읽는 독자께서도 믿으시고, 부활 신앙으로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오늘의 말씀은 부활장이라고 알려진 고전15장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유대인들에게 파장을 일으키는 예수 교도들을 반대하며 핍박하던 자신이 만난 일을 통해서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 먼저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죽은 후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부활에도 매우 많은 의미가 담겨있지만 죽으신 것 역시 인류 역하를 바꿀 만큼의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죄로 죽어야 할 인류가 죄에서 탕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큰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런 상상도 못할 의미가 담겨있도록 세상에서는 반역자들이 처형당하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성경에서는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 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가 심각하게 고민하였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만큼의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짓지 않으셨음은 물론이고, 티끌만큼의 죄가 없으셨습니다. 왜 그 십자가란 나무에 달려서 돌아가셔야 했을까요? 그것이 인류의 죄를 탐감하시기 위한 전제조건이고 흠과 티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주신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관련된 것은 이미 성경에서 예고된 것이고, 그렇다 하여도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 구원자가 되실 수 있음은 부활이라는 현상이 따라와야 성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였듯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만 있어도 증거가 분명한데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513명이란 숫자는 사실임을 여러 차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더더욱 바울 자신은 말씀드렸듯이 유대 사회를 혼란케 한다는 명분과 의분으로 그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적극 동참했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그런 일을 하다가 다마스커스라는 곳에 있는 예수 교도들을 잡으려고 그곳에 거의 다 갔을 즈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돌변해서 예수님과 그의 복음과 그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와 그의 복음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반대하던 사람이 자기가 반대하며 핍박하던 예수를 만났으니 참 민망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던 일이 무의미하고 부끄러운 일일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음과 부활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굉장한 은혜입니다. 그런 깨달음과 사명감으로 가득찬 자신에게 예수님이 부활에 대한 이견이 있음을 들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갖고 있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고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까지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알려 줍니다. 부활은 유대인들 나아가서 말씀을 깊게 연구하던 바리새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세상에서 격리하여 신앙 공동체 생활을 하던 엣세네인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생각이나 상상을 했겠습니까? 어느 복음 송가의 가사처럼 참으로 은혜입니다. 본인은 생각을 했거나 상상을 하지 못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고,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하여 주셨습니다. 부활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하여도 이제 이후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생활을 든든히 그리고 확실히 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평화와 혼란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자유가 있어도 제 마음, 제 멋대로 하는 것은 성숙한 자유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살펴서 다른 사람에게 해나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하고, 본인에게 유익하여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공동체와 관계를 파괴하는 이기적인 욕심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방언과 예언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와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잘 알고 있다면 본인이 방언을 받았다고 그냥 아무 곳에서 방언을 함으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기 감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언도 마찬가집니다. 본인이 주님께 받은 것이라고 하고 싶은 말을 아무 것이나 하는 것은 주님께 받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방언을 하여도 교회의 허락을 받을 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주신 방언과 예언이라면 교회가 어떤 형편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실 것입니다. 환경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주님께 받은 것이고,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라면서 그냥 한다면 질서와 평화와 능력의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강권하시면서 하라고 하시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뜻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성령께서는 바울을 통해 질서를 따라 하라고 합니다. 가장 큰 핵심이 주님께서 교회나 공동체에 하라고 하셔서 주신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면 받은 사람이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하실 것이고, 사정으로 못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질서를 구실로 주님의 말씀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방언과 예언을 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막는 사람까지도 주님의 뜻을 전달받을 수 있음으로써 그것이 주님께 받은 것인지 사람이 인위적으로 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만이 아니라 봉사, 헌신과 같이 좋은 것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 어느 교회, 어느 누가 선교, 봉사, 전도를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질서가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무조건 어느 상황에서나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시기와 질서가 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주신 것이면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인위적으로 본인이 주장하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가 그것을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기준이 되고, 사람이 기준이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준이 되셔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옳은 것이고, 해야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교회의 상황과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계획에 따라서 교회를 운영하시는 주님의 계획을 혼란케 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뜨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가 본인이 전하는 주님의 제안을 거부한다고 생각하였어도 기도하면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직접 말씀하셔서 본인을 통해서 하시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주님의 일은 언제나 주님께서 중심이 되셔서 하시게 하여야 합니다. 열정도 좋은 것이지만 본인의 열정과 교회의 순서를 잘 이해하여야 하고, 주님의 계획을 순종하여 받드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로 시험에 들지 않고 주님의 도구가 되어서 교회와 공동체에 유익을 주시실 축복합니다. 아멘방언은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물론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말의 의미를 압니다. 그러나 방언을 하면 성령이 자기에게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이 더 좋다는 말을 하는 것은 편차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설명하면서 자랑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방언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오셨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주님을 경험하게 되면서 믿음을 가지라는 사인입니다. 본문은 방언에 대해서 좀더 깊은 의미를 설명하여 줍니다. 방언은 영적으로 주님과 소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이 건강하여 집니다. 물론 방언이라는 말을 하면서 주님을 만나면 초월적인 세계를 경험하면서 놀랍고 감당하지 못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지만 길게 보면 주님과 소통을 하기 시작했음을 알립니다. 따라서 방언을 한다는 것은 자랑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존재와 주님에 대한 믿을 이유가 충분하여 짐을 본인이 경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본인이 주님과 주님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증거로 방언을 말하면서 자랑하였던 것 같습니다. 방언은 자랑할 내용이 아니라 본인이 주님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음을 알게 되는 표시입니다. 만약 자랑할 것이 있으면 예언이 낫다는 바울의 설명입니다. 왜 예언이 방언보다 더 낫습니까? 예언은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말씀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격려를 한다던지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주어서 사람을 회개케 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서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는 주님의 말씀 신, 구약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 구약의 말씀이 완성되어서 경전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경건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헬라어로는 로고스라고 합니다.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이고, 로고스가 살아서 능력이 있는 말씀이 되어 사람의 마음에 들려지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산 말씀이 되면 로고스를 레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감동이 되고,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 감동이 와서 하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말씀을 레마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언은 사람의 일상과 교회에 은혜를 주고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방언은 통역을 하여서 듣게 될 때까지 사실 한 개인에게까지도 영적인 범위에 속하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설명입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주님께서 주신 은사는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 주신 것이므로 교회를 위한 은사여야 한다(고전14:12)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어떤 은사일지라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끼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교회에 덕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주님께서 은사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교회에 유익과 덕을 끼치라고 합니다. 왜 교회라는 범위를 주셨을까요? 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마지막 시대에 노아의 방주처럼 구원을 하는 방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셨고, 교회를 강건하고 부흥케 하기 위해 은사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로 교회에서 본인이 맡은 사명과 역할을 잘 감당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으뜸은 사랑입니다. 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제가 이 말씀으로 다음 주의 설교를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소망과 없고, 소망이 없으면 사랑을 가졌다 하여도 자기의 범위와 역량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뿌리를 내린 믿음이기 때문에 사랑의 범위와 역량이 커집니다. 또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주시는 소망은 주님을 바라보며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므로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웅대한 꿈과 멈추지 않는 경건의 길을 가게 합니다. 오늘 아침 사랑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사랑의 내용에 gentle한 것이 있지만 강하고 포용적인 면이 있음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사랑은 오래 참는다, 사랑은 무례히 굴지 않는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라는 부모님과 같은 면을 많이 생각했었는데 오늘 저의 눈에는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면서 견딘다는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6절 말씀에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훌륭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사랑의 특징을 8절에서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크치고 지식도 사라지지만 사랑은 없어지지 않음을 알려 줍니다. 그렇죠? 하늘나라에는 예언도 방언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곳엔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서로 공유하며 사용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들을 잘 깨달아 아게 되니까 더 이상의 방언과 예언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계속 유지될 것고, 그곳엔 사랑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들을 수단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며 사랑으로 충만해 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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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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