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03편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고배갑니다. 주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파멸에서생명을 건져주시고, 사랑과 자비로 단장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ㅣ. 평생을 좋은 것으로 흡복히 채워주시는 분, 젊음을 독수리처럼 늘 새롭게 해 주시는 분이랍니다. 동의하십니까? 저는 100% 동의합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몀 사랑이 그지 없으시답니다. 두구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답니다. 인생이 그날 피고 지는 들꽃 같아 바람 한 번 지나가면 기들어 그 있던 자리마저 알 수 없는 것 같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곧 주님의 언약을 지키고, 주님의 법도를 기억하여 따르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영원에서 영원까지 주신다고 합니다. 그 주님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은 당연히 주님을 찬양하겠지요. 특히 시104편은 자연의 현상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6절 말씀 옷으로 몸을 감싸듯 깊은 물로 땅을 덮으시더니 물이 높이 솟아서 산들을 덮었습니다. 7절, 그러나 주님께서 한 번 꾸짖으시니 물이 도망치고, 주님의 천둥소리에 물이 서둘러서 물러 갑니다. 8절 물은 산을 넘고,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서 주님께서 정하여 주신 그 자리로 흘러 갑니다. 그렇죠? 아름답고 섬세하고 자연의 이치가 주님께서 도안하시고 만드신 법칙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짐을 표현하였습니다. 9절 말씀, 주님은 경계를 정하여 놓고 물이 거기를 넘지 못하게 하시며 물이 되돌아와서 땅을 덮지 못하게 하십니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지면이 수면보다 낮다고 합니다. 일본도 땅이 가라 앉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물이 땅을 덮지 않고 있습니다. 무슨 원리일까요? 표면장력의 원리 때문일까요? 그 원리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지만 땅을 삼킬만한 그 거대한 바다물이 어떻게 아직 땅을 삼키지 않고 있을까요? 대답을 시104: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계신 하나님은 물보다 훨씬 높은 땅도 물로 덮이게 하십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다음은 제가 아주 경탄하면서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주님은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시니 11절, 들짐승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들나귀들이 갈증을 풉니다. 어떠세요. 수도관을 땅 밑에 넣어서 물을 흐르게 할 때 수압 조절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산까지 흐르게 하셔서 그곳에 샘물을 나게 하셔서 들짐승, 새들 모두가 마른 목을 해갈하게 하신답니다. ㅎㅎㅎ 잠20:1절에서 포도주는 사람을 거만하게 하고, 독주는 사람을 소란스럽게 한답니다. 그리고 31에서 왕 르무엘의 어머니는 왕인 아들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라고 교훈합니다. 법을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죠? 술은 사람의 절제를 빼앗고, 나아가서는 인사불성이 되게 하여 실수하게 합니다. 그리고 건강을 잃게 합니다. 그런데도 본문에서 포도주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기름은 얼굴을 윤기가 나게 한답니다. 무슨 말일까요? 빠지지 않고 적절하게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술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경건의 대표적인 사람, 노아 할아버지도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를 하셨으니까요. 그러나 롬14장에서는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믿음으로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믿음도 없는데 취하는 것은 죄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바울 자신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믿음 위에서 행하는 자신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시험을 주고 상처를 준다면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교훈으로 듣습니다. 저는 시편을 읽으면서 104편을 읽을 때 너무 많이 공감하고 신선하고 새롭답니다. 20절부터 23절 말씀이 특히 그렇답니다. 밤에는 맹수들이 나와서 움직이고 해가 뜨면 맹수, 짐승들이 잠자리로 들어가고 그 대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서 해가 저물도록 일을 합니다. 참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리고 30절 말씀에서는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자신의 영은 부어넣어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신 창조를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겔37장에서 마른 뼈들을 군대로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게 하시고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아이들의 환호를 막으면 길가의 돌들이 환화하게 하시겠다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음을 다시 기억하게 되고 주 안에서 사는 것이 복되고 즐겁고 감사한 일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그런 주님을 소개한 후에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백성들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백성들, 왕들, 특별히 예언자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주님이 보내신 자들을 대접함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가나안으로 이끄신 목적을 시105:45절에서 알려 주십니다. "그들에게 율례를 지키고 그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반항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예를 시106에서 알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했던 비느하스와 같은 대표적인 분들을 거명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복있는 백성이 됨을 알려 줍니다. 할 일이 많은 것 같지만 딱 한 가지만 중심으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일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고 그것을 지키면 만사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행하면 마음에는 기쁨이 넘치고 입에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고기를 씹게 되고 입에서는 찬양을 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고 정의와 공의를 지키고 가난한 자를 배려하며 그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존경하는 일이 어렵습니까? 삶을 내동댕이 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즐겁고 재미나고 행복하게 하는 활력소와 같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과 주님이 주신 법과 율례를 지키는 복있는 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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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90편의 말씀은 인생이 매우 짧음을 알려 줍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 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다고 했는데 사람들의 연수가 대체적으로 칠십이고,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요즈음은 백 세 시대라고 하는데 백 세라도 팔십보다 이십이 더 많지만 여전히 므두셀라(969세)와 비교하면 매우 짧습니다. 므두셀라 역시 천 년에서 여전히 31세가 모자랍니다. 천 년이라도 지나가나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 같다고 했는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 지를 알게 해 주는 고백입니다. 모세는 백 이십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애가 말 대로 시위를 벗어난 활보다 더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처럼 빠른 시간을 잊고 삽니다. 잊으므로 무료하고 무가치하게 보냅니다. 주위 환경을 조용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은 누구에게도 공정하게 주셨습니다. 사람은 일 분 만이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매 수간 쉬는 공기를 무한대로 주셔서 어느 누구도 공기가 없거나 모자라서 죽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간 역시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시간을 악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을 무가치하게 보냅니다. 사람이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이것들을 생각하면 시간을 매우 잘 활용할 것 같은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시간을 잘 활용해서 선용하시길 축복합니다. 91편의 말씀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들이 받아 누리는 복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들은 왼 쪽에서 천 명이 넘어지고, 오른 쪽에서 만 명이 쓰러져도 그 사람에게는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에게는 어떤 불행도 재앙도 가까이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사자와 독사를 짓밟고 다니게 되고, 사자 새끼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다닐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호하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가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그를 보호하셔서 오히려 그를 높여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두려워하지 말아라. 용기를 내어라.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92편에서 의인에 대한 복을 알려 줍니다.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다.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고,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 그런 것들을 통하여 주님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일시적인 고난, 오랜 기간의 고난을 겪는다 하여도 낙심하거나 염려할 이유가 업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경건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 오히려 주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는 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95편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양하자고 합니다. 큰 소리로 외치면서 주님께 찬양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광을 받으실 존귀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97편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악을 미워하라고 제안합니다. 악을 미워할 때 주님의 빛을 받게 되고, 마음이 정직할 때에 즐거움이 샘처럼 솟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주님의 성전은 물론이고 주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의 돌들만을 보아도 은혜가 되고 즐겁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그렇습니까? 주님의 전이 있는 예배당이 그렇게 느껴집니까? 기다리고 사모하다가 교회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며 기도를 드리십니까? 복이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 그 마음으로 주님의 것들을 즐거워하는 사람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의 것들을 즐거워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복이 잇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새벽에 하나님께 드리는 새벽기도, 오해를 하면 한국 사람들이 드린 기도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해가 조금 풀리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기도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비롯하여 시편의 말씀들을 보면 다윗이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른 새벽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셔서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새벽기도는 매우 오래 된 기도의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정 습관을 공부하면 그분들은 온 가족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모님과 함께 새벽에 말씀을 읽고 기도문을 낭송하며 개인기도를 드립니다. 새벽 기도를 언제 시작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벽에 찾아가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신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새벽을 깨우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마음과 소원과 찬양을 돌려 드리며 첫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생애가 하나님께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다고 밝힙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하나님, 다윗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의 처음 시간과 마지막 시간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어렵고 힘들고 피곤한 우리들이 새힘과 평안과 기쁨으로 회복되는 곳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우리를 통해 기쁨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건강한 사람으로 채워주십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그리고 하루가 끝나는 잠드는 시간, 좀더 생각한다면 야곱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철야를 하면서 하나님을 찾아뵙고 기쁨을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시인은 궁금해 합니다. 시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궁금해 합니다. 악인이 망하지 않고 어떻게 잘 되냐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알고자 애를 썼는데 마침내는 성소에서 악한 자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며 성소의 중요성을 증언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할 때에 고통을 주시기도 하지만 긍휼을 베푸셔서 완전히 망하지는 않게 하심을 증언합니다.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잘 지키면 복을 주심을 기억하게 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해방하여 광야를 지내고 왔을 때의 일들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백성들을 천사의 음식, 곧 만나를 40년 동안 빠짐없이 주리지 않도록 먹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을 때에는 메추라기로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셨고,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여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능력에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이시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됨이 복이라고 증언합니다. 이집트에서 해방을 하고 광야를 지내고 가나안에 와서 사는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을 거절한 백성들에게 다시 자비가 없는 이방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게 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완전히 망하지 않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자신들은 도저히 헤어나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곳에서도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해방하여 주셨으므로 시인은 오고오는 세대에게 하나님을 증언하여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 오히려 복임을 알고 순종하는 그사람, 그 백성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하나님을 많이 경험합니다. 타산지석이라고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증언하며 알려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명령을 기쁨으로 받고 감사로 지켜서 복있는 삶을 누리며 하나님을 증언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하나님을 따라 의롭게 사는 분들이라 할지라도 어려움이 떠나지 않는 것 같죠? 세상을 산다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세상인데도 죽은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란 존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듯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나이가 들면 잘 해야지 했는데 요즈음 살아가면서 그리 큰 잘못은 하지 않지만 많은 반성이 됩니다.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그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생활이 그렇게 어렵다고 하면서 죽음을 선뜻 받아들이고 주님이 주신 것이니 기쁨으로 마라나타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인도 그런 일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67편의 말씀을 읽으면서 새로운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알게 하여 달라고 하며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송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 우내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아브라함의 자손들, 다윗의 백성들에게 한정시켰던 내용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유대인들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과 뜻을 받은 분들이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까지 열려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 모든 민족임을 알게 합니다. 그런 내용을 정리하거나 조절하기 위함일까요? 시72편에서는 만수 무강할 왕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힘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살펴주며 그들의 피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왕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이스라엘을 우수한 나라로 세웁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우수한 사람, 복있는 사람은 유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염원하며 하나님의 뜻과 말씀, 곧 율법과 계명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일찌기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알면 유대인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세우셔서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물론 가난하고 힘없고 어려운 분들, 장애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분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순종함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시66:11~12에서 시은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자기들의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시고, 사람들을 시켜서 그들의 머리를 짓밟게 하셔서 자신들이 불 속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답니다. 와거 가톨릭 교회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중에 생활 성서란 책이 있었는데 그곳에 감리교 이현주 목사님께서 '돌아보니 은총이었습니다.'라는 간증과 같은 칼럼을 연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시인이 그동안 겪었던 셀 수 없었던 많은 고난과 시련들을 소개합니다. 참기 어려웠던 것들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고통이었답니다. 그런 고통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만나시겠다고 하는 성소에 가서 위로를 받으며 기다려 왔는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그런 어려움을 받는 성도이십니까?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성소를 가까이 하시며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십시오. 회복이 된 이후에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성소와 하나님의 얼굴이 복 중의 복으로 자리잡는 큰 은혜가 있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나면 곤란하죠. 하나님은 약속과 보여주기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성도님을 반드시 회복하셔서 '돌아보니 은총이었습니다. '라는 간증과 찬양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성소를 우리의 처소로 삼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기쁨으로 바라는 우리가 되도록 우리를 세워가신다는 확신을 갖고 주님을 소망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믿음을 갖고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칼과 창으로 어려움을 막아 주시지 않고 '하나님의 오른 팔과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로 구원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셨다(44:3).'고 고백합니다. 어려움 속에 있을지라도 그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며 하나님께 찬양을 하라고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차이는 있겠으나 많은 자나 적은자,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 권력이 있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 모두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더라도 그 집의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스스로 초라해 지지 말라(49:16).'고 하십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를 더 알려 줍니다. 히9:27절에서 "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그 은혜가 우리 마음에 있어서 언제나 감사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시34편에 대해 블레셋 왕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다윗의 시라고 소개합니다. 아비멜렉 아기스의 보좌관이 되어서 아비멜렉 곁에 있는데 아비멜렉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블레셋의 장군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아비벨렉에게 "임금님, 저자는 우리를 수도 없이 괴롭히고, 수도 없이 죽인 이스라엘의 장군 십윗입니다. 저 자를 어떻게 임금님 곁에 둡니까?"라고 고발하며 다윗의 정체를 폭고했다고 해 보십시오. 그런 위기 안에서 살아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다윗이 임기응변으로 미친체하며 침을 흘리며 연기를 했다지만 그것을 믿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이 녀석 살려고 별 짓 다하는 구만 하며 죽이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어둡잖은 연기를 보인 자신이 민망하고 부끄럽기만 할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둡잖고 모자라는 연기를 하나님께서 활용하셔서 아기스가 다윗을 그냥 풀어주게 하셨습니다(삼상21:12~15). 하나님, 대단하시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신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할 때 다윗을 위기 중에 피하게 하신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서도 그렇고 사울을 다윗이 숨어있는 동굴로 들어오게 하심도 그렇고 또한 다윗을 눈 앞에 두고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신 것 모두가 다윗과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경검하게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뼈바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셔서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게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약속 중 뼈 마디 하나도 부러지지 않게 하신다고 하신 대로 예수님의 뼈는 로마 병정들이 부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분명 그들은 죄수들이 죽은 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리 뼈를 부러뜨려야 했는데 예수님의 뼈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이 본문 34:20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35편은 사람은 은혜를 받고도 오히려 대적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36편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어서 사람과 짐승을 똑 같이 돌보고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37편은 세상 사람, 특히 땅을 좋아하는 분들이 읽고 또 읽으셔야 할 시편입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다섯번이나 하십니다. 땅을 좋아하시고 기대하시는 분들은 시37편을 읽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받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41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병든 몸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받으면 육체가 회복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 아픈 육체 주님께 용서를 받고 화목하므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건강이 회복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주님의 백성들은 주님이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신 지성소를 향해서 기도하며 삽니다. 주님이 구원의 요새이시고, 반석이시며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29편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설명해 줍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물 위로 울려퍼지고, 주님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주님의 목소리는 위엄이 있고, 주님의 목소리는 산맥을 뛰놀게 하셔서 시룐 산을 들송아지처럼 날뛰게 하신답니다. 주님의 목소리로 백향목을 쩌개고, 레바논의 백향목을 쩌개신답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광야를 흔드시고, 주님의 목소리가 암사슴을 놀래켜 낙태하게 하고, 우거진 숲조차 벌거숭이로 만드시므로 성전에 모인 사람들잉 한 소리로 '영광'을 외치게 하신답니다. 그 목소리를 가지신 주님의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고 알려 줍니다. 30편에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소개합니다. 주님은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시고,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 옷을 갈아입시신답니다. 주님은 시인을 수렁에서 건져주셨고, 원수가 비웃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찬양을 한다고 했습니다. 31편에서는 피난처가 되신 주님께서 그 백성을 원수에 손에 넘기지 않으시고 그들의 발을 평탄한 곳에 세워주신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백성들의 핀잔처이시고, 바위이시고, 요새이셔서 그들이 힘껏 주님을 기쁨으로 찬양을 돌리게 하신답니다. 주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복을 준비하셨다가 나누어 주시므로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이 그 복을 받는답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힘을 내고 용기를 내라고 시인은 권면합니다. 32편에서 주님께 자신의 죄를 모두 고백하며 참회하였더니 주님께서 자신의 죄악을 기꺼이 용서하시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경건한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 기도하게 해 달라고...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 닥쳐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노래합니다. 악한 자에게는 고통이 많으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한결 같은 사랑이 넘친다고. 33편에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금을 타고, 열 줄 거문고를 타면서 주님을 노래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그들의 힘이 되시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기업으로 주신 복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노래합니다. 군대가 많다고 해서 왕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힘이 세다고 해서 용사가 자기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님이 구원자가 되시고, 주님이 방패가 되시므로 그들의 구원을 받고, 주님의 방패가 되시므로 그들이 승리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기다린답니다. 우리도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그 백성들에게 주신 복이 크고 주님이 기다리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기쁨 또한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복된 날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읽으신 말씀은 많은 보화를 담고 있습니다. 하늘을 비롯한 자연이 하나님의 솜씨를 알리면서 영광을 돌려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완전하신 주님의 교훈, 순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더 달콤한 주님의 말씀이심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스스로 한번 소개하여 보세요. 자기가 그동안 이해하고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공감합니다. 말씀은 힘이고, 말씀은 능력이고, 말씀은 생명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아니시겠습니까? 14절의 표현대로 주님을 향해 갖는 우리들의 묵상을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하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20편에서는 왕을 위한 말씀인데 복이 되는 말씀입니다. 왕이 명심해야 할 내용이 7절입니다.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 는 그 말씀입니다. 21편에서는 왕의 승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알려 줍니다. 22편은 우리들이 잘 아는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고난을 통해 만국의 주님이 입증되심처럼 우리들도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임이 입증될 것입니다. 23편의 말씀은 선한 목자의 양이 됨이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양은 부족함이 없을 만큼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양들이 감동을 할 만큼 좋은 것을 공급하십니다. 24편에서는 15편과 함께 성전에서의 생활을 강조합니다. 성전을 들어간다고 하지만 누구나 똑 같은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죄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5편에서는 주님을 경하는 자가 받는 복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26편에서는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의 믿음과 마음 가짐을 듣습니다. 오직 주님, 오직 예수님, 오직 십자가를 붙들고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27편에서는 시인의 단 한 자기 기도와 소원을 소개합니다. 한 편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잘 믿고 복있는 사람 어떤 사람이지요?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주님의 성전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뻐하면서 듣고 순종하는 그 사람입니다. 복의 삶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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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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