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포도원의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멀리 떠났답니다. 열매를 거둘 시기가 되어서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의 종들을 보냈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농부들이 종들을 붙잡아서 떼리기도 하였고, 돌로 치기도 하였고 급기야 죽이기도 하였답니다. 농부들이 제정신이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참 어리석기도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하면 포도원이 자신들 것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래서 어리석고 악한 농부의 비유입니다. 주인은 소출을 보내라고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농부들은 처음처럼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는데 어리석고 악한 농부들은 상속자를 죽이고 포도원을 자기들의 것이 되게 하려는 마음을 갖고 아들을 포도원 바깥으로 내 쫓아서 죽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악한 농부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포도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에게 맡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농부의 비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의 나라에서 빼앗아서 열매를 맺고 주님께 바칠 다른 나라에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 머릿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을 머릿돌을 삼으셨는데 이 돌이 어떤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두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처치하려 했으나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왜 어리석을까요?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함이 어리석습니다. 왜 악할까요?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 그리고 주인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주인의 종을 괴롭히고 죽인 것 나아가서는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기 때문입니다. 더 어리석은 것은 주인이 안 보인다고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내것이 아닌 것은 마음 가질 이유가 없고 아닌 것을 그런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어리석은 짓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지혜롭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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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을 내쫓으셨다는 말을 듣고, 대제사장들이 와 보니 그렇게 한 장본인인 예수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기가찼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도전이 많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당신에게 이 권한을 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침례 요한이라고 직접적으로 묻지 않으시고, 침례 요한의 침례가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들에게서 온 것인지를 물으셨습니다. 미리 기억해야 할 것이 침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의 배경이 문제가 없음은 사람들이 무를 리가 없습니다. 더더욱 침례 요한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그가 행한 것이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침례 요한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들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모른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그들에게 자신에게 권한을 누가 주었는지 대답도 하지 않겠다는 말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세상적 권한은 침례 요한이므로 누구도 예수님의 사역과 권한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주는 것이 옳다고 하시면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주신 비유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여보니까 유대인들과 제사장, 종교 지도자들이 패륜아, 비뚤어진 사람이라고 단정한 세리와 창기들은 주님께로 돌아오는데 오히려 주님을 믿는다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심이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창기와 세리는 주님께 돌아와서 순종하는데 말씀을 듣고, 하겠다고 약속한 종교인들은 하지 않았다고 질책하셨습니다. 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뉘우치고 행하였는데 하겠다는 종교인들은 한다고 해 놓고 하지 않았다, 결국 누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인가? 당연히 하지 않겠다고는 했으나 뉘우치고 돌아와서 행한 세리와 창기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고, 하겠다고하지 않는 종교인들은 불순종한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행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겠다고 해 놓고 하지 않는 종교인인입니까? 듣고, 행하겠다고 말씀을 드린 후에 행하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들을 때는 못한다고 했다 하더라고 뉘우치고 행하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셔서 성전에서 제물로 장사하는 사람들을 '아버지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이 일은 그날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었을 것이고,예수님은 그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란 성전 앞에서 제물을 상인들이 팝니다. 이유는 그들이 파는 제물이 성전 제사에 드리는 적합한 제물이랍니다. 주님께 제사를 드릴 때 흠없는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하는데 성전에서 파는 것이 가장 인정을 받기 때문이랍니다. 또한 동전이란 당시는 로마의 통치를 받던 시대로 성전에 드리는 돈은 이스라엘 돈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돈을 바꾸어서 드리게 하였습니다. 짐작은 하셨겠지만 성전에서 일보는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은 상인들로부터 모종의 자리세나 장사세, 그리고 또 다른 부정한 돈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돈들은 모두 백성들의 몫입니다. 상인들은 물건만 진열해 놓고 값을 매기면 백성들은 그것들이 싸든 비싸든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사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런 행위는 강도의 행위였고, 기도하는 은혜의 집을 종교인들이 상인들과 짜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사역의 초창기에 하셨다고 기록하였고, 공관복음서들은 사역 마지막에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상인들의 행위는 밝은 대낮에 강도짓을 하는 것과 같았고, 그 뒤에는 거룩한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소위 선교 바자회 같은 것들을 한다면서 교회에서 장사를 하는 경우가 그런 일입니다. 예수님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칭찬을 듣는 것이라면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드리는 것이고, 자진해서 내는 사람들에겐 팔아서 기금을 마련하면 될 듯 합니다. 만약 교회에서 이윤으로 그런 것을 한다면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꾸짖으시므로 그 나무가 말라서 죽은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랐을 때 예수님은 믿고 구하면 그대로 된다고 하시고 산을 향해서도 바다에 들려서 빠지라고 하면 그렇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능력이 그만큼 큼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런 기도를 드리도록 성전을 주셨는데 그곳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으므로 예수님께서 두고두고 부담으로 여기셨다가 결국 성전을 깨끗하게 정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표정이 어떠셨을까요? 저의 상상으로는 화를 내셨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받아야 할 위로와 응답의 성전을 오히려 강도의 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백성들은 물론이고,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시고 위로를 주시기 원하시는데 그들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의 도구들을 더럽히지 않는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자신이 죽어야 하는 날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 날을 준비하면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하는 것을 경험하는 제자들 사이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던 그대로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줄 알았을 테니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나귀도 순조롭게 가지고 올 수 있었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마자 아이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여 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노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호하였고, 더욱이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이란 호칭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전엔 갈릴리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마음들이 있었으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갈릴리 나사렛의 위상이 임금이 나오는 곳으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한껏 마음이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착찹해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죽어야 하니까요. 그 길은 갈 수 없는 길이고 견딜 수 없는 길이었으니까요. 죽어야 살고, 죽어서 썩어야 열매를 맺지만 그 길을 걷는 것은 주님만이 가실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D Day를 함께 가십니까? 본인이 예수님과 함께 D day 를 향해 걷는 그곳은 죽음입니까? 영광입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떨어져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요12:24절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그 은혜(갈2:20)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당하고, 사형을 선고 당할 것이지만 사흘 후에는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세베대의 아들 어머니가 와서 자기 아들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있게 하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알지 못하고 구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우선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잔은 그들이 마실 수 있다고 하지만 자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여 놓으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야기가 그쯤 되자 제자들 사이에 분개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위치를 말씀해 주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고, 으뜸을 받으려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지 않았고, 섬기고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기 위하여 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메시지가 세게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드시게 될 순교의 잔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서 마실 수 있다. 두번째는 그러나 예수님의 옆 자리는 본인도 제자들의 의지도 어느 누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가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죽으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었는가 하면 한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함이 얼마나 귀하고 현명한 지를 두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세번째의 메시지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낮아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긴박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한 시각 장애인이 와서 자기의 눈을 보게 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제자들은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달리 그를 불러서 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어렵고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들을 정상인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본인의 위치와 해야 할 일을 어느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어느 한번도 한 눈을 팔지 않으셨고, 시험에도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따라서 하나님께 신의를 드리며 기쁨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저도 이제는 결혼35년이 되어 갑니다. 교제한 햇수를 합하면 40년이 되어 갑니다. 한 여인과 함께 한 시간이 제 인생의 2/3가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좋은 여인을 만났다고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좋지많은 않습니다. 아마 저의 아내는 저보다 그런 마음을 더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좋은 것은 그런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40년은 오랜 세월이죠?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지루할 수도 있고, 맞지 않는 점도 있었습니다. 주례사처럼 맞지 않았기에 재미가 있고, 배울 것이 있고, 참아야 하는 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혼을 안된다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고, 남녀가 장성하여 부모를 떠나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두 가지를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을 누가 풀 수 있고, 하나님께서 닫으신 것을 누가 열 수 있는가는 요한 계시록을 비롯하여 성경 몇 곳에서 말씀합니다. 혹시 이혼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여쭈십시오. 가장 적합해서 맺어주신 한 몸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여전히 안된다고 하십니다. 예외 딱 한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음행입니다. 음행은 부부 사이를 깨는 죄악이라는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입니다. 음행으로 결혼하는 남자를 가리켜서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과 공모하는 것은 공모자 역시 죄인이라는 논리이십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못되게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나와 다른 사람도 자기가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서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우아하고, 멋지고, 행복하게 살도록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한 남자, 한 여인과 새롭게 만든 자기를 기쁨으로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길 축복합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차라리 결혼 안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이성을 향한 미련과 그리움과 사랑이 넘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고자로 태어났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중세 사제들처럼 사명을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것이 가능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실까요? 구약에 나실인에게도 지우지 않았던 짐인데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셔서 한 몸을 이루신 그뜻대로 한 남자와 한 여가가 한 몸을 이루어서 배워나가며 사랑하고, 지혜를 다하여 아름다움과 행복을 창조하는 기쁨을 창조하는 복된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요즈음 상처, 쓴 뿌리들을 말합니다. 이유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해하였고, 자신은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과로 상처를 받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서 쓴 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쓴 뿌리가 무엇운 것은 12:15절 말씀에 자신을 더럽게 하고, 많은 사람을 더러워지게 한답니다. 그렇게 더러워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 말씀과 오늘 본문을 연관하면 아주 좋을 듯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답니다. 일만 달란트의 갋은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한 나라의 일년 예산과도 할까요? 성경 밑에 있는 주석에 일 달란트는 노동자 15년 치의 품삯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만달란트는 노동자 십오만년치의 월급입니다. 왕이 그렇게 큰 빚을 갚으라고 하자 그 사람은 무릎을 꿇고 참아달라면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주면 차차 갚겠다는 탄원입니다. 왕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홀가분했을까요?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빚을 진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을 때 갚겠다고 하는 친구를 멱살을 잡고 감옥에 쳐 넣은 후에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있게 하였답니다. 참고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이라고 주석에서 설명합니다. 자기가 탕감받은 돈은 노동자 15만년의 가치이고, 자기에게 빚을 친구의 가격은 노동자 백일치의 가치입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 광경을 본 왕의 신하가 그것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그를 불러다 놓고 그를 향해 악한 종이라고 부르며 자기는 그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으므로 그도 친구를 불쌍히 여겼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그가 자신이 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두게 하였답니다. 그리고 결론에서 말씀하시기를 각각 진심으로 형제 자매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그와 같이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자기가 누구의 죄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문구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용서받은 그 은혜의 기쁨과 감사를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용서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일곱번만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 은혜에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용서합시다. 상처, 쓴 뿌리를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안에 용서를 하지 못해서 만든 상처, 그리고 퍼져 있는 쓴 뿌리를 없애버리는 지혜와 은혜가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쓴 뿌리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게 한다는 말씀을 기억합시다.오늘로 느헤미야서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마감하게 됩니다. 성서 유니온 선교회의 계획에 따르면 5년 후에 다시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좋은 신앙의 선배님이 계신 것이 감사로 느껴진 때였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책을 마감하면서 끝까지 좋은 교훈을 줍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인 두로 사람들이 성에 들어와서 물건을 팔았습니다. 그것을 샀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한 결과입니다. 광야 생활할 때 안식일의 양식인 만나를 저축하는 것은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날은 쉬면서 주님과 만나고 영적으로 충전을 시켜야 하는 날이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정확하게 정리하게 되면 주님을 만나는데 한결 수월하게 느껴질 것이고, 영적으로도 회복이 매우 빨리 옴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공기가 맑은 곳에 갔을 때 마음이 산뜻하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하나님을 온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또 한 가지를 알려 줍니다. 이방여인들이나 믿음에서 이탈한 사람들과 섞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자들을 만나면 늪에 빠지는 것과 같이 되어서 믿음 생활이 참 어렵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솔로몬 왕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는 왕이었는데도 이방 여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외면하고 신앙에서 떠났습니다. 본능과 세상을 따라가면 그렇게 됩니다. 믿음에서 이탈한 자를 만날 때도 조심해야 하고, 이방인과 섞이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순종하기까지 의지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일인가? 아니면 주님의 일인가를 확실하게 구별한 후에 주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과 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느헤미야가 예루살렘 벽 재건 작업을 마치고, 수문 앞 광장 앞에서 말씀의 집회를 통해서 부흥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에스라, 스룹바벨과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모두 함께 찬양대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성전 성벽으로 올라가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제사를 드립니다.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그 다음엔 백성들이 수확의 첫 물들을 가지고 와서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자신들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줍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룹니다. 저는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 성전을 건축한 스룹바벨, 그리고 제사장이고, 율법 학자인 에스라 그외의 사람들이 힘을 연합하여 레위인들과 함께 찬양하며 성전 벽에 올라가서 하나가 된 후에 주 하나님께 챤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 무척 감동스럽습니다. 성전을 새롭게 건축한 스룹바벨이나 성전을 재건하고 그 모든 일들을 주관한 느헤미야의 소리나 마찰이 들리 않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모두 힘을 합하고 협력하여서 주 하나님께 찬양하며 제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에스라는 에스라대로, 스룹바벨은 스룹바벨대로, 그리고 느헤미야는 총독과 관리인으로 아무 소리를 내지 않고 주 하나님을 위한 그 일에 자기가 할 수 있음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착하고 충성된 종이 주인의 일에 참여를 한 후에 종은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함과 같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은혜롭고 아름다움이 실현되고, 그런 복에 최선을 다해 참석하여 협조하고, 믿음과 고백이 한결같기를 축복합니다.어제 한 신문에 세상에서 살기 좋은 도시들을 소개한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큰 도시는 뉴욕, 로스 엔젤레스, 휴스톤, 씨애틀, 그리고 유명한 도시로는 샌프란시스코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도시는 어떨것 같습니까? 참고로 뉴욕과 샌 프란시스코는 생활하기에 가장 많은 비용이 든답니다. 몇 년 전부터는 로스 엔젤레스도 생활비가 가파르게 올라서 살기가 예전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그 도시들은 삼 십위 바깥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어떨까요? 77위 더군요. 일본의 수도 도쿄도 좋은 도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서울을 비롯하여 도쿄, 뉴욕, 샌프란시스코의 집값과 생활비는 보통 사람들이 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상합니다. 제가 우리동네를 떠나서 이따금씩 뉴욕이나 워싱톤 디 씨를 여행할 때 왜 이렇게 살기 힘든 곳이 생활비가 비쌀까를 생각해 봅니다. 물론 사람이 많이 모여있기 때문인데 그곳은 일기도 안좋습니다. 집값은 물론이고 생활비가 비쌉니다. 다닐 때도 Toll way라고 해서 돈을 내야 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시골 사람이니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도 샌 프란시스코에서 10년, 엘에이에서 3년을 살았으니까 대도시를 모르지 않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난번 샌 프란시스코를 방문해 보니 제가 살던 때와는 달리 교통이 더 막힙니다. 엘에이는 10분 거리를 한 시간 이상 걸려야 합니다. 그런 곳에 왜 살아야 할까요? 그곳에서 일을 하기때문일까요? 본문은 현대인들의 현상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수도 겪인 예루살렘에 사람들을 더 살게 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고, 그곳에 살겠다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축복을 해 줍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살기를 꺼려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루살렘에 살면 성전에 대한 의무를 해야 하고, 자기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과 도시의 일에 관여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답니다. 사람들의 경향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에 가는 곳에 가서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은 도시에 사는 것이 훨씬 더 힘드는데도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도시에 사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엔 그러질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어느 곳에 사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사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인도 여러 곳에서 성전 생활의 복과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살 곳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영을 위하여 살 곳을 정하는 사람이 복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주님은 저의 기쁨이고, 저의 노래입니다. 라는 노래를 불러도 진실로 들려질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기쁨이고 노래가 되어서 주님 가까이 사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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