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원래 예수 교도들을 싫어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교도들과 예수 교도들이 모이는 교회를 없애려고 최선을 다했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권한을 받아서 예수 교도들을 감옥에 넣기도 하였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도 찬동을 하였답니다. 한번은 다마스커스에 예수 교도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대제사장들에게 위임장까지 받아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데 그곳에 거의 다 갔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추이는데 대낮보다 더 밝아졌고 소리가 났답니다. 바울과 일행이 모두 땅에 엎드러 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불러서 누굽니까? 라고 부르니 바울이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하기를 바울을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서 왔다고 하시면서 예수가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니 가서 예수를 만난 것과 장차 보여줄 것들을 그들에게 증거하여서 그들을 하나님께 돌아와서 죄사함을 받게 하라고 하셨답니다.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예수 교도들의 핵심인 예수가 핍박하는 자기에게 경험해 보지 못했고 감당하지 못할 빛으로 오셔서 자기를 선택하였으니 일어나서 이방 사람들에게 가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러 보냈다는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핍박하는 바울보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핍박하던 바울의 입장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은혜였을 것입니다. 자기는 핍박을 하는데 예수님은 자기를 선택하셔서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라 고백하였고, 자신의 자기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언제 어느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혹시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어느 자리, 언제 만나고 싶으십니까? 핍박하는 자리, 거절하는 자리는 아니시겠죠? 성실히 주님을 찾는 자리, 기도하는 자리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좋아하고, 사모하며 주님께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나셔서 주님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그런 복이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그 은혜가 충만할 때에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은혜로운 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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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돌아가신 후 말씀대로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40일을 계시면서 필요한 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오순절이 이르었을 때까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도했는데 그곳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 일로 제자들은 목숨을 내 놓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감옥은 물론이고, 매질과 죽임과 같은 저지와 핍박이 있었음에도 사도들과 기독교도들이 복음을 전한 결과 교회 안팎에 변화가 일어난 일들을 본문에서 소개합니다. 첫째, 사람들의 숫자가 매우 많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들중에 과부들이 있었는데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 사이에 구제의 양을 두고 다툼이 있었음으로 교회에서는 일곱 집사를 세워서 그 일을 해결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일을 집사들을 뽑고 세워서 맡겼는데 기준은 사람들에게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은혜로 하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자격을 따졌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바깥에도 일어난 일이 제사장들 가운데서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후로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할 때에 죽음까지 포함한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본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란 사람들이 변화된 것도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가 가말리엘의 중재(행5:34~39)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한 사람들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인데 이 믿음, 곧 복음에 순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사장이 믿은 것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고 박해하던 사람들이 믿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치 장차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의 사람이 된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언제 그렇게 되었습니까? 첫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뵙고 기도 중에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고 새로운 사람이 된 기독교도들을 통해서 입니다. 두번째, 성령을 받은 것에 끝나지 않고 말씀을 성실하게 전파하게 되었을 때에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격주로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음 전파를 통해 교회가 숫적으로 장성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 좋은 것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것 두번째로, 믿는 분들과 복음을 공유할 수 있는 것 세번째로, 복음이 여전히 살았고, 역사하는 힘이 있음을 온 천하에 전할 수 있음이 좋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떠나서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이곳에서부터 더 넓은 지역에 그리고 땅끝까지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본문을 통해 몇 가지를 알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정말 사람이셨다. 아파하셨고, 힘들어 하셨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예수가 죽으실 때 자연에 변화를 주셔서 그의 죽음이 매우 다른 것을 알려 주셨다. 달이 해를 가려서 지구가 잠시 어두워지는 현상을 일식이라고 하죠? 요즈음에도 그런 일식들이 일어난다는 기상대의 보고를 듣습니다.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자연 변화의 현상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셔서 예수님의 죽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저와 우리 모두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시고 새로운 삶, 영원한 삶,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기 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세번째로,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 백부장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사형집행한 집행관이었던 로마 백부장은 무수한 사람들을 처형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연 현상을 포함하여 죽는 주변의 여러 정황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더욱 내면에서 들리는 신비로움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자연스런 고백은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였습니다. 예수님이 사형당하고 돌아가신 그 현장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마음으로 갈보리 그 자리로 가셔서 힘들어 하시고 아파하시고 처참하게 찢기며 피흘리신 예수님을 한번 경험하여 보십시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아버지께 힘들다는 한 마디하시고 돌아가신 예수님,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 나를 구원하신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영원히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셨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제 모세를 통해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해 나중에는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잘 듣고, 성실히 지켜서 말씀의 사람이 되시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고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에 힘입어 빛과 소금으로 사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좌우에 달렸던 강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다는 말을 오해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들이 예수님께서 드시는 잔을 들게 하고, 그들을 예수님의 좌우에 있게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요청에 대하여 그들이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마실 수 있으나 주님의 좌우는 자신이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좌우에는 요한과 야고보가 아니라 전혀 몰랐던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 두 강도 사이에는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을 합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의 나라로 인도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 강도에게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십니다. 강도로서 생을 마치는 것을 인정해서도 동정도 해서는 안되지만 미루어보아 강도짓을 하는 것도 나름 사정이 있었을 것이었다는 동정심마져 듭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인정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강도를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매순간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거절하면서도 말로는 "죽을 때 믿고, 천당으로 향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을 이따금씩 만납니다. 그런 분들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실효성이 없다면 그분은 죽게 된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어두운 곳으로 향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십시다. 그리고 좋은 믿음으 사모하고 좋은 믿음으로 사십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좋은 믿음을 갖게 되면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좋은 믿음으로 인도하시고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좋은 믿음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 갖는 믿음입니다. 오늘 좋은 믿음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면 마지막 그날 주님으로 인하여 소망과 기대를 갖고 주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지금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예수님의 생애를 사순절을 지내시면서 돌아보셨습니다.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침례 요한을 통해 침례를 받으시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역의 처음 메시지는 '회개하세요.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셨습니다. 사역을 하시는 동안 제자들 열 두명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천국이 가까이 온 것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치의 병자들은 물론이고 귀신들린 사람들 나아가서 죽은 사람들에게까지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과 귀를 의심할 만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야 말로 메시야이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커 갈수록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처형해야 하는 위기의 부담은 더 커져갔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신데 어둠의 세력이 밀려나가는 듯하다가 결국 예수님은 가룟 유다라는 제자에 의해 은 30닢에 팔리셔서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어둠이 빛을 잠시 가릴 수는 있지만 영원히 가릴 수는 없음을 부활을 통해 다시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고,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한 진리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빛의 사신으로 살게 되고, 죄 아래에서 살던 사람이 죄를 없애는 사람이 됩니다. 귀신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 때에는 놀라운 일이 예수님 혼자에게서 이루어졌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의 시대를 경험한 후에는 셀 수 없는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부족한 저의 설명을 듣는 분들 역시 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어둠의 세계에 빛을 비추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선 자신에게서부터 이웃, 형제자매 모든 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능력의 사신으로서 사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시험과 유혹에 대하여 성령의 인도에 순종한다면 충분히 극복하고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역할을 능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승리가 보장된 믿음을 잘 활용하셔서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중국 구어에 연목구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구하러 나무로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가룟 사람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준 후 판결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뉘우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은 삼십 닢을 장로들에게 되돌려 주면서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 넘김으로 죄를 지었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이 이제 그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범위를 넘어섰다고 하자 유다는 은돈을 성전에 내 던지고 스스로 목을 메달라 죽었답니다. 저는 유다가 잘못한 몇 가지가 보입니다. 첫째,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언제나 동상이몽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을 했으면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왜 대제사장들에게 갑니까?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유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선용하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일찌기 예수님을 통해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로운 사역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배울 수 있었던 기회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두번째의 잘못은 잘못을 깨닫고 고백해야 할 곳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십니다. 대제사장에게 갔다는 것 여전히 사람들끼리 해결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다툼과 분쟁과 거리가 있을 때 그런 사람과 화해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대제사장들은 자신과 불화하거나 나누어진 사이가 아니라 공모를 한 사이였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공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있던 일을 없던 것으로 하자, 나의 잘못이다. 라는 시도는 하나님께 가아야 할 방향을 악인들에게 가서 행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세번째의 잘못은 자살입니다. 대제사장에게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대답을 들은 유다는 기가 막혔을 것입니디. 그래도 여전히 가야 할 곳은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찾지 뵙고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무책임하고 악인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유다 아니라 베드로도 잘못을 할 수 있습니다. 더더욱 우리들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다. 하나님,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회개를 들으시고, 잘못을 용서해 주십니다. 스스로 악한 길을 선택하게 되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와 달라고 소리를 질러야겠죠. 그리고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아십니다. 우리들이 연약해서 가룟 유다보다 더 크고 더럽고 무서운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주님께 용서를 받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서 가볍고 내일이 보이는 희망있는 영원을 향해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예수 교도들이 신앙고백을 하는 고백문을 사도신경이라고 합니다.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이 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사람, 순결한 사람을 대표하고,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사람, 악인의 대표하는 사람으로 수천, 수억의 사람들의 입에서 고백됩니다. 예수님은 본인을 죽게 한 사람이 가룟 사람 유다였고, 예루살렘의 대 제사장, 서기관들과 율법 학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기독교인들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여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죽게 한 사람들은 장로와 율법 학자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가룟 사람 유다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처형한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다를 통치한 로마의 총독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무수한 애를 썼던 시도들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사형을 받게 합니다. 그 시도나 과정은 어찌하였을지라도 정의를 지키지 못하고 악과 동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의로운 예수님을 죽이는 인물이 되지 않으려고 나중에는 물에 손을 씻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가룟 유다처럼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가지 메시지를 찾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가는 갈6:9절의 말씀대로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빌라도는 적극 예수님을 옹호한 것도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모면할 길만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합니다. 빌라도가 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하여야 했지요? 네, 그가 유다를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으로서 유다의 사형은 빌라도와 같은 총독만이 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즐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음을 알라.'(전11:9)고 조언합니다. 빌라도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서는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심판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말씀을 순종할 때에는 상이 있으나 악마의 뜻을 따라 악을행하면 저주라는 벌을 받게 됩니다. 두번째의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번째 말씀은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였습니다. 회개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요나의 소극적인 회개의 말씀을 듣고 니느웨 백성과 왕이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할 계획을 연기하십니다. 남 왕국 유다에서 가장 못된 왕은 므낫세입니다. 그 때문에 유다를 망하게 하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잠깐 앗시리아로 붙잡혀 가서 고통을 경험한 이후로 바로 회개합니다. 그가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선을 베푸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북 왕국에서 가장 악한 왕은 아합입니다. 아합이 회개하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고자 했던 벌을 연기하셨습니다. 회개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에서 벗어날 길은 회개입니다. 회개란 그동안 행해 오던 악한 일과 말을 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며 중단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언행으로 돌이키는 일입니다. 빌라도는 책임을 운운하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악한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책임과 벌은 그렇게 행한 사람들이 받습니다. 그 벌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회개입니다. 혹시 과거 잘못한 일로 벌을 받고 저주의 삶을 산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진심으로 주님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잘못된 언행들을 중단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을 찾아서 성령의 인도로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복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한국의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국 헌정 사상 탄핵으로 파면당한 첫번째의 대통령이 되었다지요? 이 내용을 먼 훗날 아니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당한 분들이나 주위의 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탄신 백 주년을 맞이하여 동상과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그런 계획 모두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이 보도를 들으면서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으시면 물거품이 된다는 말씀도 기억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도 가인은 불행한 사람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최초의 살인자였으니까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겸손하고, 친절한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가나안 네게브 근처의 브엘쉐바로 인도하셔서 살게 하십니다. 그곳은 물이 없는 곳입니다. 우기철에 물을 받아서 써야 하는 곳인데 우기철에 비가 오지 않으면 그 해는 가뭄으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로 가기도 했고, 블레셋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곳으로 갔다가 아내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으면 고통스러운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있으라는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히브리나 이쁘루 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유리하는 사람들, 이동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랍니다. 영어로는 Nomadic tribe인데, 한 곳에 정착을 하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민족이란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당연히 권력이나 안전이 보장 되지 않습니다. 계속 움직이며 살아야 하므로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쫓겨야 하고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한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다던지 도시를 형성해서 사는 사람들은 이동하는 사람들과 달리 권력도 있고, 부도 축적하고,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시의 사람들, 한 곳에 정착해서 사는 농사하는 사람들보다 히브리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을 갖고 계시며 그들의 생활을 안전하게 보살펴 주십니다. 가인은 한 곳에 정착해서 사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그의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으로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며 어렵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은 다른 사람들을 헤치거나 강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가인의 것을 받지 않으심은 가인의 행위가 하나님께 맞지 않았음을 당연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가인에 회개하고 온전한 제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아벨을 죽입니다. 가인은 왜 몰랐을까요? 하나님께서 어려운 사람들을 매우 자세히 보고 계신다는 점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아벨을 찾으십니다. 그러자 가인은 자신의 혐의를 전혀 부인하며 오히려 "제가 아벨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면서 돼 묻습니다. 그렇게 가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진실을 말씀하시고 가인 역시 떠돌이가 되게 하십니다. 그때에도 가인은 하나님의 처사를 못마땅하다며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인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안전표를 주셨습니다. 몇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데 어렵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러나 기뻐하십시다. 하나님이 눈동차처럼 돌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안전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두번째로, 잘못을 하셨습니까? 진심으로 진정으로 회개하십시다. 회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도구입니다. 아벨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 볼 수 있듯이 악인은 회개하지 않고 언제나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합니다. 세번째로 다른 사람의 불의함 때문에 마음에 원한이 쌓여있으십니까? 푸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곳까지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었던 원한의 시비를 가리시고 공정하게 심판을 하십니다. 오늘 하루 나쁜 일로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고 좋고 선한 일로 하나님께 기억되시길 축복합니다.예수 믿고, 구원받는 다는 보증을 들으면 죄가 자동으로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죠?~. 본문에서 하나님은 빛이심을 알려 주고, 그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어둠, 곧 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분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라고 할 만큼 여전히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는 죄를 어떻게 이해하고 죄와 어떤 관계를 취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신앙인이 갖고 있는 죄는 주 예수님께서 피흘려 갚아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그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죄로 느껴질 때 중단하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죄를 탕감받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라. 그리하면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떠한 이유에서건 죄가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 장이가 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죄를 발견하거나 깨달을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받을 때 그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를 깨닫고, 죄를 짓지 않음도 그리고 죄없이 살려는 수고와 노력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신에게 죄가 없다. 또는 내가 수고해서 죄를 짓지 안으면서 살려고 하였다며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셔야 합니다. 발견하고 깨닫는 죄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대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됩니다. 죄와 관련되어 우리가 죄롤부터 벗어난 사람이 되려는 수고는 모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성화의 과정이며 거룩으로 나가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이십니다. 하루를 지내시면서 그리고 밤에 잠에 들기 전에 자기에게 발견된 죄들을 정리하여 보십시다. 그 죄들을 두고 피한 것에 대하여서는 감사하고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것들은 회개하므로 용서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죄를 떠나서 죄로부터 멀어지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 가까이 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복음과 교회의 일을 하면서 실수를 할 때 그리고 필요없는 낙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하겠나? 어려운 이민 교회에 출석을 하면서 때로는 헌금을 많이 하시는 분도 있고, 봉사도 많이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분들이 이따금씩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하겠나? 그래서 교회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교회의 방향이나 분위기가 본인의 생각과 마음에 다르면 출석을 하지 않기도 하고, 봉사나 헌금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혹시 그런 경험을 갖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래서 본인이 얻은 결과가 무엇이었는지요? 제가 처음 목회할 때 지역의 유지이며 의사이신 분이 저에게 와서 고백을 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본인이 교회 재정의 얼마를 부담한다고 약정하고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교회를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교회가 믿음도 없는 자신이 출혈하는 것을 몰라주더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났답니다. 떠나면서 내가 없는데 잘 되나 보자란 마음을 가졌더 랍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계속 유지되고 발전하더랍니다. 그 교회를 목회하시던 목사님께서 다른 곳으로 사역지를 옮기시고 제가 왔는데 이제 다시 교회를 나와더 되냐고 물으시더군요. 물론 환영합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헌금은 하지 마시고 마음에 감동이 되는 대로 헌금도 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헌금을 꽤 하시고, 봉사를 많이 하시는 분들은 내가 떠나면 잘 되나보자라는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보면 봉사를 많이하셔서 꼭 계셔야 할 분이 이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유지됨은 물로 더 큰 역사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먼저 개척을 한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바나바와 바울이 목회를 하였는데 교회가 크게 부흥을 해서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온 교회가 기도를 하고 선교사를 선택했는데 하필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하라고 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두분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그 두분이 교회를 떠나서 선교에 임하였어도 안디옥 교회는 계속 부흥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를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에 불행하게 제자들 모두 도망을 하였습니다. 자기만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던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닭이 두번 울기전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며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시켜 주었을까요?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산헤드린 회원과 또 다른 산헤드린 회원 니고데모였습니다. 이 두 사람들 중에서 니고데모는 일찍이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삶을 물으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심문이나 심판없이 잘못된 사람으로 정죄하는 것을 문제삼다가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샀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성대하게 장례시켜 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부자의 새 무덤에 묻히셨는데 이는 구약 사53:9절에서 예언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탄생과 사역, 심문과 심판, 십자가에 죽으심 모두 구약과 예수님의 사역에서 예언된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죽으셨고 시신은 부자의 새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헌금할 수 있음은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일이나 핍박을 받음처럼 기독인의 특권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복된 일에 본인을 사용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오만한 마음이나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오만이나 착각을 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없으면 어떻게 되나 원망이나 낙심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가 그 일에 합당하지 않으면 가장 적합한 사람을 불러서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할 수 있을 때 감사함으로 봉사하고 수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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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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