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제게 보인 몇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이삭은 복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180세까지 살았다는 것도 복의 요소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들들의 두 가정이 비교적 화목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비교적 화목했다는 표현은 에서가 야곱과 화해를 한 이후에 특별한 사건이 없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개입하시겠지요. 아들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 복된 일이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시편133편에서는 형제가 화목함이 아론의 수염과 같고 헐몬의 이슬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화목한 아들들이 아버지의 장례를 은혜롭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음은 복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두 아들 모두가 부자였습니다. 두 아들의 재물을 한 고장에서 수용할 수 없을 때 형 에서가 옮기는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복의 사람이 살아야 하는 곳이 바로 가나안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깨달은 것은 자녀들일지라도 부모님을 꼭 빼닮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오직 한 여성 리브가와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네 여성, 그리고 에서는 세 사람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허기야 요즈음과 다르고 특히 중동에서는 아내가 많은 것은 부를 상징했으므로 아내가 많은 것이 당시로서는 탓할바가 못되지만 요즈음 신앙인의 시각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을 때 일부일처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야곱과 에서는 아버지 이삭과 달리 여러 여인들과 살면서 자녀들을 두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화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장 기뻐했을 사람은 이삭과 리브가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녀가 원한을 갖고 서로 보복하며 산다는 것은 본인도 힘이 드는 일이지만 부모는 더 힘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목케 하시고 화목케 하는 직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고 고후5:18절에서 알려 주었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살고 화목하며 사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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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아들들이 비열하고 잘못된 일을 저지른 후에 세겜의 정서가 확연히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이 그곳을 떠나서 예전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피신을 갈 때 주님을 만났던 곳으로 가자고 하면서 몸에 갖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명령하였을 때 모두 아버지 야곱의 말씀을 순종하였다고 합니다. 야곱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앟았나 봅니다. 자녀들에게 명령을 한 후에 순종을 하게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자녀들의 전적인 동의를 받고, 아버지 야곱은 예전 어려웠을 때 함께 하시며 도우셨던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피신을 하는 야곱의 가정에 대하여 아무도 저항하거나 공격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두렵게 하셨답니다. 벧엘은 주님의 집입니다. 주님의 집으로 갈 때 준비해야 하는 세 가지를 본문 2절에서 알려 줍니다. 첫째 갖고 다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린다. 둘째, 몸을 깨끗이 씻는다. 셋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의지로써 주님을 뵙고자 준비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섞여있는 우상 신상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살펴보시고 모두 제거하여 주님만 의지하시고, 몸과 새 옷을 갈아입으므로 죄를 씻고, 새 사람으로 사시길 축복합니다. 이렇게 벧엘로 올라간 후에 야곱은 그곳을 엘벧엘, 벧엘의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벧엘에서는 언제나 도우시는 주님이셨기 때문이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엇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집에 계시는 하나님! 그곳으로 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죽고, 또 씻지 못한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죽은 두 사람은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가 죽어서 장례를 치른 일이라고, 또한 사람은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은 일입니다. 라헬은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내 슬픔의 아들이라고 짓고자 하였지만 야곱은 오른 손의 아들이란 뜻의 베냐민이라고 지었습니다. 오른손은 능력을 가리킵니다. 야곱이 주님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볼 때 어떤 마음 자세였는지를 알려 주는 대목입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었음입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은 후에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비극은 첫 아들 루우벤이 이복 엄마이자 야곱의 첩인 빌하를 범한 일입니다. 이 일로 루우벤은 장자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장자가 받을 복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하는 것은 야곱의 형 에서를 통해서 그리고 아들 루우벤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자리를 붉은 죽 한 그릇에 팔아넘겼고, 루우벤은 죄를 범함으로써 장자의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엘벧엘의 하나님을 보면서 주님께 회개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새 삶이고, 희망있는 삶임을 알게 됩니다. 더럽고 추한 수많은 세상의 것들에게 순결하고 충성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엘벧엘의 하나님을 만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주님께서 한 성을 공격을 할 때에도 먼저 평화와 화친을 선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들과 싸움을 택하지 말고 화친과 평화를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자녀들이 행한 행위들은 부끄러워서 차마 생각도 하기 싫은 짓들입니다. 자신들이 제안한 안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사귐에 대하여 꿈을 꾸며 기뻐하는 사람들을 살해한 일은 야비하고 잔인한 행동입니다. 거기다가 제안한 내용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할례라는 예식입니다. 하나님을 팔아서 그런 못된 짓을 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의 아들들입니다. 그런 짓에 대하여 아버지 야곱까지도 나무랐다고 합니다. 나무라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그렇죠? 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받아들이겠냐마는 그래서는 안 되는 범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의 여동생을 창녀처럼 대했기 때문이랍니다. 창녀? 창녀인 사람을 부인이 되게 하려고 혼인을 준비합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 잘못과 죄가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서 부터 온 것입니다. 제사장이자 사사였고 사무엘의 멘토였던 엘리의 아들들 역시 그렇게 못된 놈들이었습니다.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했을까요? 네,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한다는 것이 꾸중 정도였습니다. 무서운 현상이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아들이나 딸들은 더 큰 죄를 짓습니다. 그것을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는 슬픔과 회개의 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무릎을 꿇고 통회해하고 자백하는 그런 참외를 해야 합니다. 죽겠다는 그런 의지가 나타나야 합니다. 제가 야곱의 아들들이 잘못한 일을 보면서 이것은 어느 면을 보아서도 해서는 안 될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들이 있는 목사로 저의 아들은 어떨까를 늘 생각해 봅니다. 많은 잘못이 있습니다. 지적하고 꾸중을 하는 정도에서 나가서 주님께 회개하고 통회하면서 아들과 딸을 바르게 살며 자비와 친절을 베풀며 살게 하여 달라고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자녀들로 인하여 더 큰 죄를 짓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 드립시다.세겜에 도착한 야곱의 가족에게 고민스런 일이 생겼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그곳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그곳 추장의 눈에 들어서 그에게 욕을 당한 일입니다. 비슷한 일이 후일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딸 중에 다말이 있었는데 이복 오빠 암논이 이복 누이동생을 짝사랑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다말을 욕보이고, 쫓아냅니다. 그것에 앙심을 품은 다말의 친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일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사건과 관련하여 주님께서 벌로 주신 일이었지만 일은 사람이 저지르고 다윗은 자식들 간에 더러움과 칼 부림이 일어나는 그런 아픔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디나를 욕보인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디나와 아들이 혼인을 하고 야곱 가정과 화목하게 지낼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가정이 요청하는 것을 심사숙고하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과 혼인을 하는 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 일을 제일 먼저 시도한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이후로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가나안 여인들과 혼인을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상황이 반대입니다. 디나는처녀이고, 디나를 흠모하는 세겜과 그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하는 할례를 행하겠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주님께 여쭈어야 하죠. 그러나 이야기 상으로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스스로 주님의 사람이 되겠다면서 할례까지 받겠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되고 고민이 됩니다. 이유는 이방인과 섞일 수 있을까? 라는 점입니다. 고후6:15절과 16절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화합할 수 없고 주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하지 않으며 빛과 어둠이 사귈 수 없고, 정의와 불의가 짝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신자들에게 불신자들과 멍에를 함께 하지 말라는 말씀이 떠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는 불신자였던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이방 수로보니게아 여인의 믿음을 큰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고민을 덜어주는 말씀에 도움을 주는 성경의 기자인 성령의 코멘트가 본문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혼인과 화해를 청하러 온 세겜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임수를 써서 그에게 할례를 제안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할례를 자신들이 공격할 빌미로 사용하기 위하여 속임수를 쓰는 비겁한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그 사실에 대하여 야곱이 꾸중(창34:30)을 하였지만 그런 일은 꾸중 정도로 끝날 조그마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전개되면서 소개되었지만 그 일을 주도한 인물들은 시므온과 레위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성정을 계속 간직하여 이후에 요셉에게 보복을 할 때 주도적인 일들을 한 사람입니다. 그 일로 이집트에서 요셉에 의해서 감옥에서 갇혀 있게 됩니다. 부모님은 자식의 잘못을 분명히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야곱은 디나와 세겜의 문제를 주님께 여쭈어야 했고, 주님께서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과 혼인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을 것입니다. 세겜이 암몬처럼 욕을 보인 후에 다말을 쫓아낸 것도 아니고, 오히려 혼인과 화친을 청하였고, 자신들이 주님의 사람이 될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주님의 이름을 이처럼 먹칠 하였습니다. 형 에서와의 화해하는 크고 큰 산을 넘은 야곱과 그의 가족은 디나를 통해서 비교적 작은 문제에서 넘어지는 실패를 경험합니다. 영적인 일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작다고 생각하는 일에 더 깊은 관심을 써서 실패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고전10:12절에서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야곱이 달라졌습니다. 얍복 강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를 살해하기 위해 오는 형과 그 무리를 피하기 위하여 잔 머리를 많이 사용했던 야곱인데 주님을 만난 후에는 오히려 자기가 대열의 가장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또 하나의 전술인 정공법을 사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본인이 자연스럽게 가정 대열의 맨 앞으로 나갔습니다. 물론 형 에서가 자기를 살해하기 위하여 대동하던 무사 4백 명을 뒤로 물린 것이 아닙니다. 형 에서는 그대로 왔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맨 앞에서 형을 만나로 갔습니다. 그러자 형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와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울었습니다. 형 에서가 두 팔을 벌리고 야곱에게로 달려와서 야곱의 목을 끌어 안을 때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에서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야곱이 질렸겠구나 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지만 동생 야곱에게로 달려오는 형 에서의 얼굴은 야곱을 살해하기 위한 악마의 얼굴이 아니라 동생을 사랑하고 반가워하면서 기뻐하며 달려오는 얼굴이었습니다. 당연히 야곱이 안심했겠죠? 야곱의 마음은 안심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형이 좋아서 그동안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서 야곱도 형의 얼굴을 붙잡고 울었습니다. 물론 에서도 울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꿈에도 꾸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후 에서가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야곱 주위에 있는 여인들과 청소년 아이들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중동에서 많은 자녀는 복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현상이었습니다. 에서의 짐작대로 야곱의 아내들과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야곱에게서 일어난 현상들이었습니다. 이어서 또 묻습니다. 본인에게 보낸 가축 떼는 웬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것 역시 큰 것이었고, 복의 소산이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예측대로 형을 위해 보낸 선물이라고 대답하였고, 야곱에게는 그보다 훨씬 많은 가축 떼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그처럼 많은 복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없지만 주님께서 에서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에서의 마음을 보복과 살해의 마음에서 사랑과 친절과 긍휼의 마음으로 바꾸어주지 않으셨을까요? 야곱이 주님의 복을 받은 것을 보고 에서는 오히려 좋아하며 야곱을 평안케 하여 줍니다. 그 증거는 에서가 야곱이 준 선물들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동생으로 대하는 형 에서를 보면서 야곱의 마음이 열려서 형이 자기를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을 보니 형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원수가 하나님으로 보이는 순간입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면 이렇게 됩니다. 본인이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원수 같이 느껴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그 사람을 주장하셔서 바꾸어 주시면 하나님과 같이 느껴지고 보여지는 현상이 생깁니다. 그 다음엔 에서가 야곱의 호위무사로 자처합니다. 물론 야곱이 형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하지만 그 일로 에서와 야곱의 원한 관계가 사랑과 배려와 친절의 관계, 화목한 형제애로 바뀌게 됩니다. 브니엘의 하나님께서 평화와 화목의 형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에게 바뀐 것이 또 하나 보입니다. 자기가 살 곳의 땅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 은 백 냥을 주고 산 일입니다. 그동안 야곱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성서가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정당하게 돈을 주고 자기가 장막을 칠 곳을 샀음을 처음으로 알려 줍니다.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람 관계에서 대가를 치르는 것만큼 떳떳한 것이 없음을 야곱이 타향살이를 통해서 배웠음을 알게 됩니다. 할 것을 하지 않거나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안전하거나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낼 것을 낼 만큼 부유한 사람이 된 야곱입니다. 모자라서 또는 아까워서 안 냈다. 못냈다는 변명과 핑개가 없는 야곱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야곱을 그런 넉넉한 사람, 부자가 되게 축복하셨음을 배우게 됩니다.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주님의 얼굴을 뵙자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환경을 바꾸고 사람을 바꿉니다. 물론 자기 자신도 바뀝니다. 주님의 얼굴을 뵈었습니까? 주님께서 자신도 환경도 만나는 사람도 바꾸어 주셔서 평화롭고 화목한 환경으로 바꾸어 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사기의 고수꾼들이 20년 동안 함께 공생하여 오다가 한 사기꾼이 야반도주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기꾼이 야반도주한 사기꾼을 쫓아가서 만나기는 만났는데 특별히 왜 추격을 하였는지에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나에게 딸들과 손주들과 키스로 작별인사를 하게 하여 주게 였습니다. 그가 평상시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에 아름답게 평화의 작별인사를 하고 끝내기 위하여 마치 도둑을 추격하듯이 있는 힘을 다해서 추격한 후 따라 잡았습니다. 그렇게 힘을 다해서 잡은 후에 하는 말이 작별의 키스를 하고 보내야 하겠네라고 한다면 속보인다고 할 것입니다. 라반이 그런 속보이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주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좋은 말이든지 나쁜 말이든지 하지 않도록 주심하라(창31:29)고 겁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본인 스스로가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이 아니셨으면 힘으로 제압을 하고, 야곱의 것들을 강도 이상의 못된 짓으로 강탈하였을 것입니다.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야곱을 부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야곱은 부자가 되게 하시고, 보호하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여러차례 경험을 하고서도 왜 그렇게 야반도주를 해야 했을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여전히 약했기 때문이겠지요? 야곱을 통해서 다시 확인하고 다집하십시다. 잘 되게 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나를 그 어떤 사기와 무력과 공격에서도 지켜 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시고, 주인이시므로 어디서 누구에게도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비롭고 관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을 경험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야반도주라든지 인색하든지 궁색한 언행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관대하며 여유가 있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믿음이 드러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평화를 만들며 사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야곱에게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분명히 외삼촌이신 장인과 상의 하에 자신의 몫을 챙겼는데 야곱에게 많은 생긴 양으로 인하여 외삼촌과 아들들, 그러니까 야곱의 처남들에게 냉대와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인즉은 야곱이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처남들과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은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야곱 때문에 부자가 되었고, 야곱과 맺은 약속을 번번히 어겼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문을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언론 플레이라고 하지요? 그렇게 소문을 내는 이유는 자신들이 야곱의 것을 빼앗기 위하여 가공의 디딤돌을 하나 만들어 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못된 술수는 요즈음에만 있지 않고 아주 아주 먼 옛날에도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 소문을 들었고, 그런 상황을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외삼촌과 처남들의 눈초리가 달랐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야곱에게 조상의 땅, 친족에게 돌아가라고 급기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삼촌이나 처남들 때문에 돌아가라고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충분히 그런 류들을 처리하시고피하게 하실 수 있었지만 때가 되어서 그들의 잘못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내들을 모두 자기가 양을 치는 곳으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 모두가 순조롭게 모두 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하자 아내들도 하나 같이 아버지를 성토하였습니다. 아버지로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아버지의 태도가 자신들을 딸이 아니라 남과 같이 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내들이 아버지를 떠나는 것을 동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내들이 야곱의 설명과 제안에 반대를 했다면 야곱의 거사(?)는 위기를 맞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들이 하나 같이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나아가서 아버지를 성토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을 통해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야곱 본인에게 상황을 알려 주시고, 자신이 인식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 즉 관련된 사람들로부터도 제안을 수용하고 함께 하도록 하십니다. 그냥 독단적으로 더 심하게 강압적으로 하게 하지 않으시고 순조롭게 하십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야곱은 20년 동안의 밧단아람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혼자 일을 처리하고 따르게 하지 않고, 먼저 주님께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서 주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 순조롭고 힘있게 진행하는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어떤 일이든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면 은혜롭고 순조롭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게 하지 않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아서 쉽고 순조롭게 일을 해결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야곱이 입을 열어서 자기를 집으로보내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야곱의 외삼촌은 야곱을 질리게 한 듯 합니다. 야곱은 외삼촌이 자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외 삼촌을 압박하고, 그 틈새로 자기 몫을 챙길 틈을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야곱이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외 삼촌을 알게 된 야곱은 자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야곱을 알고 있는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보내주지 않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압니다. 야곱은 자기의 아내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갈 것을 외삼촌에게 일찌감치 고지함으로써 야곱이 떠날 때는 그들과 함께 갈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미래를 고지한 야곱은 외삼촌이 받아들일 매우 쉬운 방법을 택합니다. 얼룩무니, 아롱진 무니가 있는 양새끼들만을 자기가 갖겠다고 하였습니다. 외삼촌으로서는 너무 가볍게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야곱의 수가 매우 단순하고 저수였기 때문입니다. 아롱지고, 얼굴무지가 있는 수놈이나 암놈의 양들을 빼돌리면 그런 새끼는 낳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아주 멀리 격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라반이 전혀 보지 못했던 블라인드 스팟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집에 와서 분명 자기가 잘 된 것은 야곱이 주장하는 그의 성실이나 열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기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주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과 협상을 하면서 야곱의 주 하나님을 생각지 못합니다.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함께 하시면서 야곱을 도우셨고, 그 하나님 덕에 자기가 잘 된 실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야곱이 이상한 짓을 했습니다. 새끼를 베게 된 어미 양들을 데리고 물가로 가서 나무에 그림을 그린 모양을 보여주면서 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무슨 짓을 하나 할 정도로 우스운 것이었지만 야곱의 시도대로 새끼들을 아롱지고, 얼굴진 무늬의 양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졸지에 부자가 되었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계획과 술수를 훨씬 넘어서십니다. 넘어서실 뿐 아니라 사람의 술수와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깨실 수도 있습니다. 라반은 야곱 때문에 하나님의 혜택을 받았으면서도 실제의 일에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하나님의 사람이 그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사람을 도우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알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기억하다 보면 어렵고 힘든 고비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은 걱정과 염려를 낙심하고 두려워하기보다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화를 주시겠다(빌4"6~7)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주님께서 도우실 것을 기대하면서 세상과 다른 마음과 능력으로 세상에 주님을 알리며 복음을 전파하는 복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잠16:4절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악인의 악함도 주님께서 사용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과 라반이 하는 일들을 보면 야곱은 복 있는 집안에서는 꼼수와 잔꾀가 통하였는지 모르지만 라반의 집에서는 당하고 있을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라반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야곱의 자손들을 축복하십니다. 물론 라반의 딸과 여종들로 야곱의 아내가 된 사람들의 시샘을 통하여서도 자녀 낳는 일을 시샘과 기쁨으로 합니다. 아이를 출산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인데 복된 집 안에서 정상적으로 출산하였다면 야곱이 아내의 아픔을 감당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경쟁적으로 출산을 하다보니 야곱은 사랑과 기대의 대상으로 아내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습니다. 어쩌면 외삼촌에게서 겪는 시련과 고통을 아내들을 통해서 잊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곱의 첫번째 아내인 레아와 동생이었고,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던 동생 라헬의 출산을 통해서 주님의 공정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편에게 사랑은 물론이고, 관심 조차 거절당한 레아는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아기를 여러 명 출산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한 라헬에게서는 아이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주님을 통해서 공평하신 하나님, 그리고 기도가 매우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라헬이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 야곱에게 주님께 기도를 드려서 아기를 자기도 낳게 하여 달라고 강청을 하자 야곱이 화를 내면서 자기가 하나님이 아닌데 아기 못 낳는 것을 어떻게 하라냐면서 호통을 쳤다(창30:1~2)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던 라헬에게 주님께서 그녀의 호소를 들으시고 라헬의 태를 열어주셨다(창30:22)는 말씀을 기자가 전해 줍니다. 생명이 주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되고, 사라, 리브가, 라헬 그리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를 보면서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은 여인들은 아이를 늦게 주신(?)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럴 수록 더 열심히 주님께 기도하여야 하겠고, 하나의 팁이 있다면 주님보다 그 아이를 더 사랑하지 않겠다. 또는 주님께서 주신 아이이고, 주님께서 주인이심을 늘 기억하겠다는 고백이 필요함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것에 몰입되어서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더 가질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갖고 주님께서 멀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것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오시도록 늘 한 쪽 문은 닫아놓으시는 주님을 깨달으시고 감사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본문은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본문은 그렇게 길지 않지만 메시지는 여러개입니다. 첫번째의 메시지는 전도서의 기자가 충고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간단하게 일을 하게 하셔도 사람이 일을 복잡하게 합니다(참고, 전7:29). 야곱이 왜 부모 형제 자기가 자란 고향을 떠나서 낯선 타향으로 가야했고, 그것도 혼자서 위험하고 고독하게 쫓기는 사람이 되어서 낯선 곳으로 가야한 이유는 주님을 앞서 나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도록 기다렸으면 되었는데 그리고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며 보기만 했어도 되었는데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물론 자기가 받아야 할 아버지의 복을 형이 받게 된다면이라는 가정과 위기가 조급하고 다급하고 하나님을 앞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것이 있으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면 화목하고 안정되게 하셨을 것을 하나님을 앞서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야곱이 두렵고 외로움 속에서 돌을 베게 삼아서 잠을 자는데 주님의 천사들이 자기를 지키며 보호하여 주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들개나 짐승들에게 먹이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조금 도 건드리지 못하게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복잡하고 힘들게 만들어도 주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심을 야곱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세번째는 주님의 계획과 약속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사람은 이러저런 사람과 상황을 통해서 변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브라함 할아버지, 이삭 아버지에게 하신 그 말씀을 야곱에게도 하여 주십니다. 야곱이 비록 도망자처럼 피신하고 있어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대하셨던 같은 위치와 강도로 축복하여 주십니다.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여 주겠다는 말씀과 땅의 모든 백성이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야곱에게는 더 하여 주는 것이 있습니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는 말씀을 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늘 야곱과 함께 하여 주실 것이고, 주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룰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늘 좋으신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는데 그 말씀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도망자의 신분이라 하더라도 전혀 그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더 많은 복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네번째의 메시지는 야곱이 주님을 그제야 깨닫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이곳까지 계시는데 내가 그것을 미쳐 몰랐다. 또 하나는 주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면 자기가 주님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합니다. 십일조란 주님의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주님께 돌려드림으로써 자기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다섯번째 메시지는 자기가 주님에게 받은 은혜를 감사하면서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께 약속드린 모든 것을 지키겠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베델이라는 돌을 쌓아둔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돌을 쌓아둔 것은 주님을 기억하고, 자기가 약속드린 것을 지키겠다는 결단과 고백을 표시하는 증표입니다. 이는 마치 남녀가 혼인을 약속할 때 그리고 결혼을 했을 때 한 몸이 되어서 사랑하고 존경하고 존중하겠다는 증표의 반지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기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고, 자기 또한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는 증표를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고, 나중에 모세도 하고, 아내 십보라를 통해서 아들들에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마음에 할레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에게 주님을 위해 결단하고 고백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증표가 있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너는 나의 것이야,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할게, 내가 너를 축복한다. 라는 증표가 있는지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몇 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만들어 주신 것들입니다.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도 좋고 자기 스스로가 만든 것도 좋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신앙의 대상도 아니고 더더욱 우상도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주님을 향한 자기의 믿음의 고백과 결단이 담긴 것입니다. 오늘 메세지들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시인의 충고처럼 기다리라는 말씀 그러면 주님께서 순조롭게 그리고 은혜롭게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새겨지고,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저에게 있는 흔적(스티그마)가 생각납니다. 주님을 앞서 나가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만들지 않아야 하겠지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계획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셔서 아무도 건드리거나 해를 행하지 않게 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주님을 위해 힘껏 사는 믿음의 사람이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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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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