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0년 1월 31일입니다. 한 달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새 해가 완전히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에겐 설이란 구정이 있는데 그 설이 25일이었으니까요. 제가 한동안 알았던 나무는 로뎀 나무였습니다. 로뎀 나무는 엘리야가 이세벨의 탄압을 두려워하여서 붙잡았던 나무였습니다. 로뎀 나무는 가지도 적고 나뭇 잎도 적어서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나무인 반면 에셀 나무는 가지도 풍성하고 나뭇 잎도 많아서 나그네를 쉬게 해 주는 나무랍니다. 에셀 나무의 근처는 탄송 동화작용으로 인하여 시원하기까지 하여서 무더운 날 나그네나 순례객들을 시원하게 하여 주는 나무랍니다. 아브라함이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과 평화의 조약을 맺은 다음 브엘세바라는 우물을 파고, 그 옆에 에셀 나무를 심었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생 나무와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고, 그들을 번성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주님때문에 늘 번성하고 나아가서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하지 않았어야 하는 일을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과 군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다시는 속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자신들을 속인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자신들을 어렵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에서 믿음의 사람이 착하고 친절하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주 하나님을 편협하고 이기적인 하나님으로 전락시키게 됨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영생하게 하시고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못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그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없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힘이 들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고난과 고통을 받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 주님께 해결을 받아야 하지 스스로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요청을 해서는 안 됨을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자기의 마음 속에 다음을 확인하십니다. 자는 영생하게 하는 하나님의 나무인 에셀나무이다. 나는 에셀 나무다. 아멘하시길 축복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 것이 없는 곳을 에덴을 만드시고, 물이 나지 않는 곳에 물이 나게 하십니다. 가장 넉넉하고 풍성하게 사시며 이웃에게 그것들을 나누어 주면서 주님을 증거하는 에셀 나무이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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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경사가 생겼습니다. 백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태어난 일입니다. 백 살에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를 안는다고 가정하여 보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냥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주님게서 말씀하신 대로 태어난 아이이므로 과연 하나님이시라는 고백과 감사가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그 기쁨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 때문이었습니다. 일찌기 아브람과 사래가 자신의 상속인으로 엘리에셀이 어떻겠냐고 주님께 여쭐 때 그들의 몸에서 태어난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도 이집트에서 얻어온 하인, 곧 죄를 지어서 받은 여인과 아브람이 동침해서 얻은 아들을 낳은 일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이미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 갈등이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번엔 엄마와 소년이 된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 다음으로 소중한 이삭을 골려주는 일로 인하여 그들을 집에서 쫓아내는 일이 생겼습니다. 사라는 미움에 차서 그들을 쫓아냈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쫓아내게 되었습니다. 아픔입니다. 주님의 계획과 뜻을 거스리면 그런 아픔을 갖게 됩니다. 그냥 기다리라고 하시면 기다려야 하지 사람이 주님을 앞서가면 그런 아픔이 떠나질 않습니다. 없으면 없는데로, 닫으시면 닫는 대로 주님을 기다림이 복이고 지혜이고,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비껴가므로써 결국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상처를 주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주님께서 그들을 살려 주셨지만 이스마엘과 하갈에겐 씻을 없는 쓴 뿌리가 되어서 여전히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혹시 본인이 원하는 아들과 같은 기쁨, 결과를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힘든 과정을 겪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어떤 결과를 원하십니까? 기쁨과 함께 그 기쁨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고 싶으십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죠? 그냥 기다림이 최고입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도 마찬가집니다. 바울이 알려 준대로 자신은 뿌렸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고전3:6)라는 원리를 잘 알고 맡은 자는 그냥 충성만 하면 됩니다. 기쁨은 자기가 얻은 것을 통해서도 받게 되지만 그 기쁨은 영원하지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최고이고 영원함을 간직하여 하겠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싶으십니까? 주님을 기다리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는 지혜와 믿음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로 인하여 죽게 될 것을 알고, 어느 곳에 가든지 부부가 아니라 오누이라고 하자는 약속을 했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내인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약속을 했답니다(창20:13). 그런 부부 간의 약속 때문일까요? 한번은 이집트 땅으로 갔을 때 그리고 본문에서는 블레셋으로 갔을 때 그런 걱정과 예상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를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죄를 지어 가면서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본문에서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잘못 근본은 그가 주님께서 살라고 하신 곳을 떠난 것입니다. 본문 1절 말씀에 잠시 떠났다라고 알려 줍니다. 실수와 죄는 순식 간, 잠시 동안 하는 것이지 오랫 동안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잠시와 순식 간이 길어지고 습관이 되면 오랫 동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믿음의 사람들이 실수와 죄가 습관이 되도록 오랫 동안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두번째의 죄는 살기 위해 주님께 기도하기 보다 죄의 굴레로 자신들을 맡긴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전능하신 주님, 죄를 싫어하시는 주님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어려움이 오자 주님을 찾고 부르짖으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지켜야 하는데 아내를 달라고 하는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에게 그냥 넘겨 줍니다. 그런 일로 인하여 블레셋은 왕부터 평민까지 어려움을 겪고 아브라함은 부끄러운 변명을 합니다. 예전엔 이복 동생이었다 하여도 현재는 분명한 아내입니다. 궁색한 변명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본문을 보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결과로 이웃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이런 결과가 있음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간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본인이 잘못하여 이웃이 연관되면 그들까지 피해를 입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인데 징계를 나누어 주어서는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본인의 정체성을 잘 알아서 이웃까지 기쁨과 행복을 주는 복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거룩한 이야기, 선한 이야기, 좋은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만 있지 않고 사람들이 죄은 죄를 적나라하게 기록한 이야기이고, 죄가 없으시고 죄를 싫어하시는 공의로훈 하나님께서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을 구원하신 이야기임을 알고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롬5:8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인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도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 하였고, 3: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의를 이루신 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하여 죄가 없으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죄를 씻어주는 피를 흘리고 희생하게 하셨다(롬8:32)고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니까 고상하고 거룩한 이야기나 말씀만 있다고 하면 성서를 잘 모르는 생각입니다. 성경에는 죄로 얼룩진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예로, 최초의 사람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사건, 그것도 하나님께서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금령을 어긴 사건을 비롯해서 홍수 때 구원을 받은 노아가 실수한 사건,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하신 다윗이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인 등등의 숨기고 싶은 내용들을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죄가 가득하고 얼룩진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큰 할아버지의 중보로 살아나온 아브라람의 조카 롯의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한 이후에 아버지와 관계를 하고 아이들을 얻는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들을 어떻게 교육하였는지 딸들은 자신들의 목적과 계획을 정한 후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마음이 없음은 물론이고, 윤리도 도덕도 없는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가만히 보고 그냥 두십니다. 사람이 행하는 일을 주님의 뜻대로 제지를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서도 주님께서 가만히 계시니까 괜찮다, 허락하셨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그림자조차도 없으시기 때문에 죄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는 눈을 감으십니다. 그것을 꼭 아시고 죄를 짓는다 하여도 아셔야 합니다. 또 하나는 멸망받을 사람에 대해서는 죄를 짓는 것에 대해 주님은 전혀 관여하지 않으십니다. 히12:8에서 그런 사람을 향해 사생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녀는 죄를 짓거나 잘못을 하면 징계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아브람도 죄를 짓습니다. 이집트에 내려가서 거짓말을 한 후에 그리고 블레셋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브람과 사래는 매우 부끄러운 일을 당합니다. 그런데 롯은 잘못을 하는데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차이입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통탄하면서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죄를 지으면서도 기뻐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자신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죄를 떠나냐 합니다. 시119:7절과 11절에서 죄를 떠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그림자도 없으시므로 하나님의 자녀 역시 그래야 함을 명심하십시다. 주님께서는 자녀가 죄 짓는 것을 그림자도 허용하지 않으시지만 죄를 지을 때는 침묵하며 아파하십니다. 절대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요즈음 Smoke free지역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Sin free가 되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본문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아브람의 조카 롯의 이야기이고, 또 한 사람은 롯의 큰 아버지 아브람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지나갔고, 아브람의 부탁을 기억하는 천사들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비교됩니다. 두 천사께서 조카 롯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롯도 큰 아버지 아브람처럼 그 두분을 대접합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다른 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브람은 살진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를 하게 하였고, 치즈를 내놓고, 본인이 직접 대접하는 등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분주하였다면 롯의 경우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구워서 상에 차려 드렸다는 내용이 있을 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동네 사람들이 롯의 말을 귓전으로도 듣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하는 사람들을 말리는 롯을 조롱하면서 위협을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경우는 원로들이 아브람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내주신 지도자라고(창23:6) 하였습니다. 물론 사라의 장지를 찾는 아브람에게 어느 곳이든 선택하라고도 하였습니다. 롯에겐 사람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일까요? 저는 양자에게서 이유를 찾고 싶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나쁘다. 또 하나는 롯이 그런 곳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롯은 그들에게 인정을 못 받고 있다. 는 것입니다. 자, 동네 사람들과는 그렇다라고 하여도 롯은 자기의 딸과 결혼할 미래의 사위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관계가 다르지만 그래도 아브람의 아들 이삭은 백 살이 넘은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고 줄로 묶고 모리아 산상의 제단에 올려 놓을 때 그냥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롯의 사윗 감들은 자신들을 살리려고 하는데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참 복이 없는 롯이었습니다. 또 다른 것은 두 딸과 아내를 데리고 소돔을 벗어나는데 아내가 천사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망하는 소돔을 보다가 소금 기둥으로 바뀌게 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아브람의 아내 사래도 남편을 어렵게 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아내였기에 아브람은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바치려고 했을 때 아내를 따돌렸던 것 같습니다. ㅎㅎㅎ 아내를 알았고, 아브람은 그런 아내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고 일을 진행하였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롯에겐 그런 치밀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 19절 말씀에서 롯은 두 천사에게 자기를 좋게 보아서 구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일 읽을 29절 말씀에서 천사가 롯을 구해 준 것은 롯 때문이 아니라 아브람을 기억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 천사가 떠난 후 아브람은 여전히 자기와 함께 하는 주님께 여섯 차례에 걸친 중보를 드렸고, 롯을 위하는 아브람의 정성을 들으시고 그를 기억하셔서 롯을 살려 주셨다고 합니다. 롯은 큰 아버지 아브람의 공으로 천사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 다른 사람의 복이 없으면 살기가 어려운 사람을 아브람과 롯에게서 배웁니다. 언제 우리 자신은 아브람처럼 복의 사람으로 살 수있을까요? 네, 주님께서 주시면서 주위의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마음을 갖고 잘 나누어 주면서 살면 아브람처럼 그렇게 복되게 살 수 있을까요? 물론 자기를 믿고 주시는 주님이야말로 최고로 모시고 대접해야 하겠지요. 하나님을 최고로 알고 하나님을 최고로 모시고 주님의 뜻과 계획을 잘 따르는 사람이 복된 사람임을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영향을 미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늘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비교적 짧은 양이지만 내용은 매우 풍성합니다. 첫번째의 내용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일입니다. 세 사람의 순례객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식사를 대접하고 받아서 잡수시기까지는 아브라함에게 존대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으로 아들을 낳게 되는 날짜를 말씀하실 때부터는 말씀을 낮추십니다. 우선 세 사람의 순례객으로 오신다는 표현은 낯설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삼위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으시지만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들이라는 엘로힘을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이 한분이 아니라 복수의 하나님이심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말씀에서는 세분이심을 분명하게 알려 주십니다. 제가 삼위라고 하였는데 삼위이시지만 한 분이심을 다른 말씀이 나올 때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례객이나 천사로 다가오시지만 정작 주님이심을 알려 주실 때부터는 말씀부터가 다르게 표현하심을 본문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두번째의 내용은 사라와 진실 게임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라는 분명히 자신이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듣고는 가기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말씀을 하신가라고 비웃으면서(차하크) 중얼거렸답니다. 그것을 들으신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비웃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말씀하셨겠죠? 사라가 놀랍니다. 자신이 비웃은 것을 아시고 드킨 것에 대한 즉각적인 사라의 반응은 안 웃엇다 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너는 웃었다. 이때 아브라함이 보인 반응이 무엇일까요? 하하하 아브라함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까지도 보시고 속에서 생각하는 것까지 듣고 아십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알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니다. 너는 웃었다라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사라를 더 이상 반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나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을 세번째의 일로 저는 읽었습니다.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은 사라와의 진실 게임에서 모든 것을 안다라는 말씀을 미리 하심으로 마음에 한 것까지도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두번째로, 아브라함이나 사라까지 자신들의 능력이 죽은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렘32:27절에서도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에게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명할 것이라고 하시면서도 예레미야에게 땅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그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역시 남자를 알지도 못하고 그런 일이 아직은 없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그냥 임신하게 하시겠다고 하면서 내가 못할 것이 있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아직 사건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말씀하셨고, 마리아의 경우는 남자가 없는 경우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비록 나이가 늙어서 월경을 하지 않는 사라이고, 아브라함은 백세가 일 년이 남았다고 하여도 조건이 모두 갖추어졌는데 할 수 없다는 것은 불가능이 없으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 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빠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입니까?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내 사건엔 불가능이 없다라고 한 나폴레옹 때문이 아니라 주심께서 하셔야 불가능이 없게 됩니다. 요셉도, 다니엘도 자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라고 늘 간증하며 하나님의 현실에서 실현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못 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믿으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을 증언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아브람이란 이름의 뜻은 존귀한 아버지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도 아브람이란 이름을 25년 동안이나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과 사래의 몸에서 아이를 주셨을 때가 되자 아브람을 찾아가셔서 그 이름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의 뜻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 성서에서 표기한 의역을 따르면 여러 민족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그 이름을 주신 것을 생각해 보니까 이스마엘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고, 그 일을 계기로 또 다른 민족도 생각하십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되는 일은 아니지만 에서의 후예들인 에돔도 생겨나고, 또 다른 그룹이 생겼는데 기독인과 같은 매우 큰 집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라는 세 좀의 사람들에서 모든 민족, 모든 종족을 아브라함의 후예가 되게 하시겠다는 마음을 갖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사람들의 조건을 하나 만들어 주셨습니다. 할례입니다. 신약에 와서 바울은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라고 하였습니다(롬2:29). 바울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할례로 받아들이면 크리스천들도 아브라함의 후예가 되고,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말씀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꿈꾸지 못하는 일들까지를 생각하시고 이루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에서 태어나는 이삭도 생각을 못했는데 이삭을 낳게 하시고, 한참 더 나아가서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도록 그의 이름까지를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을 누가 이해할 수 있고 생각하겠습니까? 마음에 할례가 있습니까? 주님을 생각하며 잘라낸 것, 바울은 갈6:17절에서 상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좇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할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지고가는 자기 십자가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예인 할례입니다. 이 할례가 있을 때 아브라함의 후손일 뿐 아니라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도장입니다. 이 도장은 성령께서 찍어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도장이 있을 때 심판의 천사가 알아보고 그를 피하여 간다고 하였습니다. 할례는 신분을 말해줄 뿐 아니라 보호해주는 표적도 됩니다. 복음과 예수님으로 인하여 지게 된 십자가가 은혜가 되고,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비껴가면서 아이를 생산한 사라와 아브람의 이야기가 있고, 또 한 가지는 사라의 종이며 아브람의 첩이 된 하갈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번의 이야기에서 저는 사람의 눈에 좋게 보여도 죽음으로 가는 길이 있다. 또는 망하는 길이 있다는 말씀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기다리면 됩니다. 특히 아브람의 부부에게는 주신다고 몇 차례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번엔 아예 하나님을 비껴갔습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생산하겠다는 행위입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으나 각자의 상상에 맞기겠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행동은 스스로를 어렵게 한 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야 여성으로서 대접을 수 있는 사회에서 종이라 할지라도 하갈이 아이를 출산했을 경우 그 다음 자기가 처해야 할 위치를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너무 근시적이었지요? 스스로 무덤을 판 하와였습니다. 하갈이 임신을 했을 때부터 주님께서 하갈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생명은 주님께서 주시기 때문이십니다. 비록 사람이 일을 그르쳤어도 주님의 생각이 모두 있으신가 봅니다. 하갈에게 주신 말씀은 집으로 돌아가서 주인 사래를 섬기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으로 이스마엘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하갈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하갈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시는다는 히브리어 세 개가 나옵니다. 이스마엘 그리고 주님께서 보신다는 엘로이 그리고 세번째는 브엘로 헤라이라는 이름인데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브엘로헤라이라는 단어는 계속 나오니까 잘 기억하고 계심이 좋습니다. 나를 돌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 샘이고 그 샘은 물이 나오지 않는 광야에 있는 샘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에겐 보이지 않다가 주님께서 볼 수 있는 눈을 주신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샘입니다. 그러니까 신기한 샘입니다. 주님께서 주인을 우습게 여겼다가 쫓겨난 하갈을 위로하시고, 메시지를 주신 후에 브엘로헤라이를 보게 하셔서 기운을 차리게 하신 후에 돌아가게 하신 샘입니다. 사람이 잘 되었어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하갈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늘 겸손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잘 유지함이 지혜로운 사람임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을 비껴가지 않으시길 바라고, 잘 되었어도 자기의 위치와 신분을 지키면서 겸손하여서 늘 은혜가 넘치는 생활을 유지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예언은 누구나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그의 입에 말씀을 넣어주셔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번성해 가실 것인가에 대하여 알려 주십니다. 그것을 알려 주신 계기가 아브람의 기특한 생각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나이가 훨씬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한 것에 대하여 나름 아내와 계획을 한 듯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자 자신들의 계획이 집에서 일하는 집사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는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상속인은 그가 아니고 아브람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데리고 가서 밤 하늘을 보여 주신 후에 아브람의 자손을 별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그 말씀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시고 반드시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당시 고대근동 지역에서 행하던 동물을 쪼개어 언약하는 예식을 치르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람의 자손을 다른 나라로 보내셔서 사 대에 걸친 4백년 간의 종살이를 하게 하신 후에 살고 있는 그곳의 많은 재물을 갖고 나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아브람에게 주신 땅 가나안엔 아모리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와서 살게 하실 것인데 4백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 그들을 가나안에서 쫓아낼 만큼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15:16)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쫓겨날 사람들은 아모리 사람들만이 아니라 겐 사람, 그니스 사람, 갓몬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그바 사람, 아모리 사람, 가나안 사람, 기르가스 사람, 여부스 사람이라고 하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자 아브람이 나름 이런 저런 궁리를 합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아주 먼 앞날인 그러니까 거의 천 년에 가까운(아브람의 앞날,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과 그의 형제들 + 430년) 해에 대해서 알려 주시면서 아브람을 안심시켜 주시며 위로하십니다. 주님의 약속을 받으셨는데 그 약속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어떤 약속은 바로 지금 아니면 자신의 당대에서 이루어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랜 세월 후에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시고 위로와 소망으로 굳건해 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오늘 말씀을 읽고 제목을 정하는데 약간의 고민을 좀 했습니다. 제목이 몇 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정신으로 했습니다. 아브람의 첫번째 정신으로 의리라고 할까요? 아니면 덕이라고 할까요? 이것은 조카 롯에 대한 돌봄입니다. 조카 롯이 살게 된 소돔과 고모라에 전쟁이 났는데 불행하게 그들이 연합군들에게 패해서 전쟁 포로가 되어 끌려 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이 자기 집에서 훈련시켜 오던 군사 삼백 열 여덟 명을 데리고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하러 나섰습니다. 참으로 무모하기도 하였지만 다행히 아브람의 군대가 조카 롯을 붙잡아 간 군대와 전투를 하고 승리해서 롯과 그의 가족들과 물건들을 찾아서 돌아오게 됩니다. 상당히 위험한 일을 감행할 만큼 아브람에게는 조카를 돌보는 의리가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사병 삼백 십팔 명이 있을 만큼 아브람의 병력도 대단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진짜 전투를 하는 군사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보통의 위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람의 믿음과 이야기들을 우리가 더 보지도 듣지도 못할 뻔 했습니다. 두번째의 정신은 하나님의 종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보인 헌신과 온화함입니다.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맞으로 갔다가 그와 그의 병사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자들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을 축복하였고, 아브람은 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 중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아브람은 소돔 왕에 대해 섞이지 않으려함이 단호하였습니다. 소돔 왕이 구하여 온 사람들은 자기에게 돌려주고 물건은 모두 가지고 가라고 했지만 아브람은 그와 함께 한 병사들이 먹은 음식과 아브람을 도와서 같이 싸운 사람들의 몫만을 제외하고는 자기는 실오라기 하나라도 갖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유가 그자 때문에 자기가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브람은 소돔 왕과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고, 그가 누구였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과 얽히길 싫어앴고 더우기 그 때문에 하나님께 누가 되는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롯을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이 터져 나오는 일오 망합니다. 이번 사건은 전쟁으로 큰 고생을 한 일입니다. 어려움을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점검해야 합니다. 잘못이 있었으면 그것을 빨리 청산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물우물 그곳에 앉았다가 롯은 더 큰 어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죄의 자리는 빨리 청상하고 떠나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와 반대로 아브람은 소돔 왕과 거리를 둘 뿐 아니라 그와는 관계를 하지 않으려는 것을 봅니다. 죄를 떠나야 하고 죄와 얽히면 안 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본인이 있는 자리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죄의 자리라면 주님이 한 두 번 경고하실 때 깨닫고 빨리 떠나시길 권면합니다. 죄가 물질로 성으로 또 다른 불의한 것으로 유혹을 할 때 단호하게 아니라고 거절하는 믿음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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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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