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러나 크게 읽으면 선해야 한다라는 말씀에 연결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뒷 부분의 내용을 잘못이해하여서 문제가 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조금 후에 간단히 나누겠습니다. 첫째,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게 되면 영광이 되고, 핍박으로 고난을 주는 사람에게 떳떳하게 됩니다. 물론 그 사람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핍박을 하던 사람이나 주위의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선한 것을 고집하냐는 말을 들을 때 대답할 말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쉽게 함부러 하지 말고,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자, 이제 이따금씩 문제가 되는 내용을 나누겠습니다. 복음과 기독교의 교리는 죽은 사람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망자에 대한 절과 예도 갖추지 않습니다. 이미 그 영은 떠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맡겨진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의 사람이 영이나 영이 떠난 육에 대하여 어떤 행위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려고 돌아가셨을 때 영으로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설명해 주는 말씀이 노아 때와 노아의 때를 심판한 물이 세례라고 합니다. 만약 뒷 부분이 없으면 옥에 갇힌 영들을 방문하셨다는 말씀에 나름 할 말이 있겠으나 그 역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영이나 망자에 대하여 어떤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근거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 이해한 본문은 노아의 때 방주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방주로 불러 들일 때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사람들을 독려하셨다는 은혜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구약에서 늘 세분, 또는 두 분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노아의 때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옥에 갇힌 영을 방문하셨다는 것은 죽음의 세력에 갇혀서 구원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셔서 그들을 방주로 인도하시길 힘쓰셨다고 이해합니다. 또 하나 노아의 때를 심판한 물과 그곳에서 방주로 살아난 노아의 여덟 명 식구를 세례로 설명하십니다. 네, 저도 확실히 동의합니다. 세례란 것은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때에 모든 사람이 죽고, 노아가 살아남처럼 우리 모두 죽었어야 하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주 안에서의 새로운 삶, 곧 중생입니다. 주님과 은혜 안에서 다시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선하고 정의롭게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가진 소망에 대하여 묻는 사람에게 언제나 답변할 말을 준비하라는 말씀으르 기억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로 여기며 사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0 Comments
Leave a Reply. |
Archives
January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