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바울이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몇 몇 사람들을 나무란 이야기를 나눕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본인을 올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사도들을 낮추기 위함도 아닙니다. 복음과 은혜를 분명히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이 안디옥에 왔을 때 자신들이 이방인과 함께 숙식하는 것을 피할 그때까지 예수를 믿었어도 여전히 이방인과 자신들을 차별하였습니다. 물론 말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의식에는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떠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이방인과 차별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죄인과 세리, 창녀들과 함께 지내셔서 예수는 그들의 친구라는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그 사람과 대화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시기까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 시대에 정치적으로 가장 높았던 빌라도의 집 안에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이방인과 자신들을 차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고 제사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예수님께서 희생하시고, 죄를 없애주신 이후에까지 갖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누구나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행동하며 사는 것은 죄인과 의인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할례는 마음에 합니다. 할례란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님이라는 예식과 표시입니다. 그것을 마음으로 믿어서 간직하며 살면 됩니다. 율법은 더 이상 자기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자기를 온전하게 하여 진리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는 안내판입니다. 이처럼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들을 상대를 정죄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위로하고 격려하여서 서로가 주님의 몸을 이루는 건강한 지체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처럼 행동하며 사는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심으로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이 늘 드러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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