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총체적인 파국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이 어느 나라의 침공을 받아서 고통을 받는 것이 총체적인 파국이 아닙니다. 무엇이 죄인지를 모르는 어두운 밤을 맞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눈에 들보를 갖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판단하고 탓하는 이스라엘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배경이 된 레위 사람은 하나님의 종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건강하고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가 아니라 첩을 두고 삽니다. 그것이 그 때의 풍습이라면 그 정도의 죄가 이스라엘에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마음과 뜻에 따라서 교회를 바꾸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를 하여서 교회를 바꾸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이 현대 교인들의 모습이라면 그 정도로 신앙이 제 멋대로입니다. 교회의 사역자도 물론이지만 교인들 역시 주님께서 교회를 이루게 하신 지체입니다. 특별한 주님의 뜻과 보내심이 있어서라면 몰라도 본인의 기호나 감정에 따라서 옮기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레위인의 첩을 윤간해서 죽인 베냐민 지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결코 잘 한 것도 아니고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서 레위인은 자신의 죄를 보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탓이라고 하면서 본문 28절에서 소개하는 비느하스처럼 주님의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3:13절의 말씀에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때 남왕국의 왕 여호사밧의 체면을 보아서 그렇게 한다고 하며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을 알려 줍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때를 지날 때 사용하는 사람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사람이며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두운 현실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게 한 비느하스는 이스라엘이 발람의 꾀로 미디안 광야에서 염병으로 죽어갈 때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님의 편에서 헌신한 사람입니다. 문제와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로 미루지 않고 자기의 죄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비느하스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비느하스는 사십만명이나 되는 큰 군대로 이만육천 칠백명 밖에 되지 않는 베냐민 병사에게 두번이나 패배를 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사용된 인물입니다. 전쟁이나 치유나 회복은 세상의 기술과 과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고 회개하고 믿음을 회복하는 사람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민족에서 귀하게 쓰임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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