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일을 하였던 모세가 기록한 시가 시90편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시를 읽노라면 사역을 매우 힘들게 하였음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인에게 오면 쉽고 가볍게 산다고 하셨는데 성서에 기록된 사역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끼면서 사역하였던 것이 느껴집니다. 전도사의 기자는 오래살면 살수록 사는 만큼 힘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사역하셨을까를 생각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세상을 보는 마음을 이 세상만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둘째, 주님께 삶을 맡기고 사는 지 자기가 지고 사는 지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각을 철학에서는 세계관과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가벼운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이런 상태를 불교에서는 해탈하였다고 한다지요? 불교에서 구도자가 그런 것을 깨달았다 하여도 해탈을 통해서 오는 평안과 기쁨과 가벼움이 계속 유지될까? 그것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과의 차이라고 봅니다. 네, 댑이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믿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롬14:8)는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운명론자의 삶이 아닐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유는 본인이 주님의 인도와 은혜를 받고, 그 삶을 선택하여서 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환경이 왔을 때 현실 그대로를 받아들여서 잘 이해하려고 하며 한편으로 주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현실을 종합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풀어갑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인도를 받아서 합니다. 종은 하라고 하시는 대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라는 믿음과 고백을 갖고 그냥 합니다. 그러나 삶의 큰 그림은 주님의 은혜 사는 세계가 자신의 마음에 펼쳐져 있어서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기쁨이고, 은혜이기 때문에 힘들고 괴롭지 않습니다. 본문의 경우 주위에 어렵게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괴롭습니다. 그럴 때는 시험을 본다는 마음(참고, 고전3:10절 이하)으로 상황을 믿음으로 풀어갑니다. 어렵고 힘들게 하는 원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갖기 보다는 어려운 환경을 주님의 도우심으로 시험을 잘 통과하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시인처럼 주님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려울 때 구조선과 같고, 좋을 때는 시원한 안식을 제공하여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양식이 되고 음료수가 되고, 길잡이가 되므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많이 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주님께서 말씀으로 그리고 기도의 응답자로 나아가서 함께 하시면서 도우시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고 힘들어 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기뻐하면서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주시고, 연단을 통해서 인내를 주시고, 인내를 통해서 성숙하게 하신다는 롬5장의 말씀을 기억하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을 허락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함께 하시며 피하게 하신다는 고전10:13절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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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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